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사람들
새벽 6시경 기차역 앞에서 보았던 환경미화원을 몇 시간 후에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어느새 주(主)광장의 지하보도를 청소하고 있다. 우리가 혁명광장이라 부르는 이 광장의 정식 명칭은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싸운 전사들의 광장’이다. 길거리에는 노숙자로 보이는 한 남성이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다. 하지만 구걸은 하지 않는다. 지하보도로 길을 건너 밖으로 나오니 20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 한 명이 주머니를 놓고 구걸을 하는데 초췌하기는커녕 힙합가수 같은 이미지이다. 90년대 초 모스크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나 노숙인들을 만났을 때의 충격과 복잡다단했던 심정이 떠올랐다. 서울에서도 숱하게 마주쳤는데, 또 어느 나라에서건 만날 수 있는 모습이었는데, 당시 굳이 거기에서 더 복잡하고 서글픈 심정이 되었던 이유는 70여 년간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나라에 새로이 생겨난 풍경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행기 안 옆 좌석에 앉았던 인연 덕분에 아들의 승용차로 나를 기차역까지 데려다준 따냐는 휴대폰 심(SIM)카드를 구입하면 꼭 전화하라고 당부했다. 내가 무사히 잘 다니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배려이다. 심카드를 구입한 휴대폰 매장에서 일하는 두 청년은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이 아니다. 한 명은 하바롭스크에서 왔고 다른 한 명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왔다. “비라인(통신사 이름)이 연해주에선 1위예요. 천만 명 가량이 사용하죠.” “다른 지역에선 다른 통신사가 1위일 거예요. 엠티에스나 메가폰 같은 거요. 러시아 인구가 1억4천5백만 정도니까요.” 내 질문에 친절히 답해 주는 그 둘을 번갈아 보며 다시 물었다. “하바롭스크는 가깝지만 뻬쩨르(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약칭)는 엄청 먼데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근무하나요?” “회사에서 지역이 다르게 직원들을 돌리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을 신청할 수 있어요. 저는 일 겸 여행 삼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지원했습니다.” 뼤쩨르에서 온 청년의 대답이다.
문득 경주와 제주도의 숙소에서 만난 서울 출신 청년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도 알바 겸 여행 목적으로 다른 도시에 와 게스트하우스의 ‘스태프’(직원)로 일한다고 했다. 물론 이 ‘스태프’의 보수는 매우 적어 숙식 제공과 여행 기회, 색다른 경험에 방점을 찍고 온 것이다. 취업에 고통받는 세대지만, 나름의 ‘공간’을 확보해 ‘쉬어가는 페이지’에 머무르는 20대들이 있다. 그들은 기차를 갈아타듯 때가 되면 휴지기에서 이행기로, 또한 새로운 길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기성세대는 그저 그들을 격려해 주면 된다.
휴대폰 매장의 러시아 청년보다 짧게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다 갈 사람들 중 한국인, 중국인 관광객들을 특히 많이 볼 수 있다. 전자는 개인관광, 후자는 단체관광이 많다는 점이 차이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바트’로 불리는 ‘울리짜 포키나’(포킨 제독 거리)에 들어서자 한국인 관광객들이 줄 지어 선 곳이 눈에 띈다. 환전소인 줄 알고 다가가보니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린’을 파는 식당이다. 아마도 방송이나 블로그를 통해 ‘맛집’이라고 소문 난 곳인가 보다. 언젠가부터 모두 같은 곳에 점을 찍고 지나가는 것이 한국인의 여행스타일로 자리잡은 듯한 느낌이 든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여행이 되기 십상이다. 반면, 현지인들이 드나드는 골목의 허름한 식당에서 나만의 모험을 해보는 것은 공산품보다 수제품에 가깝다.
'아르바트'로 불리는 '울리짜 포키나'(포킨 제독 거리). 사진/필자 제공
기차역과 이웃한 항구
유럽 쪽에서 오는 사람들에게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끝’이겠지만 한국에서 가는 우리들에게는 블라디보스토크가 횡단열차의 시작점이다. 물론 도시 건설 시작(1860년)과 철도역 완성(1893년) 시점으로 따진다면야 이쪽이 종착지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시작은 끝이 되고 끝은 시작이 된다. 모스크바가 시작이고 러시아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럽이 중심이고 아시아가 변방이 되는 것도 아니다.
1992년 가을, 첫 학기 미학 과목 세미나 수업을 맡았던 블라디미르 릐쿠노프 선생님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당시 교수의 ‘강의’에는 그 과목에 해당하는 강사의 ‘세미나 수업’이 동반되었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가 원하는 대답은 <철학사전>에 쓰인 것이 아닐 거야...’ 학생들은 망설이며 침묵했다. “어느 시대건, 플라톤 시절에도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그 시대가 ‘모던’이고 그 이후는 ‘포스트모던’이 됩니다.” 세상만사, 보는 각도에 따라 상대적이다. 각자의 인생에서 지구는 종종 ‘나’를 중심으로 돈다. 나는 2019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1992년의 모스크바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나의 종착점은 2019년의 모스크바이다.
대조국전쟁(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블라디보스토크 출신 장병들의 명단에는 김씨 성이 여럿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블라디보스토크처럼 기차역 바로 옆에 항구가 나란히 있는 경우는 보기 드물 것이다. 혁명광장의 조형물 중에는 이 도시가 2010년 당시 대통령이던 메드베데프로부터 ‘군사 영광의 도시’라는 명예 칭호를 서훈 받았다는 내용의 기념비가 있다. 더불어 또 다른 부조가 눈에 들어온다. 배 위에 쓰인 이름 “장 조레스”, 그리고 그 옆에 그려진 한 인물, 대양을 가로지른 세계 최초의 여성 선장 안나 셰찌니나(1908~1999)이다. 그런데 그녀가 ‘세계 최초의 여성 선장’으로서 ‘사회주의 노동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을 때 모스크바에서 문서 입증을 요구하자, 17세기 해적선에 여성 선장이 있었던 것 같다는 증거 때문에 고심하던 지방 당국이 결국 ‘소련 최초의 여성 선장’으로 바꾸어 서류를 올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녀는 탄생 70주년에 후자의 자격으로 ‘사회주의 노동의 영웅’ 칭호를 받았다.
혁명광장의 부조물 '장 조레스' 호와 최초의 여성 선장 셰찌니나. 사진/필자 제공
장 조레스(1859~1914)는 프랑스와 국제사회주의운동의 한 지도자였다. 그는 진보 일간지 <뤼마니떼>를 창간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해 평화를 주창하다가 암살당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딴 소련 배 <장 조레스>호는 셰찌니나가 지휘했던 함선 중의 하나였다. 셰찌니나도 <장 조레스>호도 일반 화물의 운송뿐만 아니라 ‘대조국전쟁’(2차 세계대전)에 참여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 냈다. 군대와 군수 물자를 수송하며 임무를 수행하던 <장 조레스>호는 1942년 1월 나치의 공습으로 사라지게 된다.
C-56 잠수함 박물관의 외관. 사진/필자 제공
블라디보스토크의 금각만 부두에는 태평양 함대의 군함들이 떠 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웅적인 전공을 세운 소련 잠수함 ‘C-56’(영어로는 S-56)이 박물관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 잠수함의 승조원이었던 장병들과 지휘관들의 이름도 배 주위에서 볼 수 있다. 잠수함-박물관 옆에는 전쟁에서 산화한 장병들을 기리는 ‘영원의 불꽃’이 보인다. 빼곡히 쓰인 전사자들의 이름을 훑어 내려가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김, 이, 박씨를 찾아보자!’ 1941년~1945년 사이라면 강제이주를 당했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전몰자 명단에서 더 많이 찾을 수 있겠지만, 고려인을 찾는 내 눈 안에 박, 림/임, 국 그리고 여러 명의 김이 들어왔다. 대부분의 경우 러시아식으로 바뀌었을 이름의 머리글자로는 본래의 이름을 알 수 없고 성씨만으로 짐작할 뿐이지만, 나는 이후 다른 도시에서도 쓰라린 심정으로 김, 이, 박을 우선 찾게 되었다.
C-56 잠수함 박물관 내부. 사진/필자 제공
하바롭스크로 가는 이유
1994년 블라디보스토크를 상징하는 공식적인 자연물로 진달래가 지정되었다고 한다. 남한의 국화가 무궁화, 북한의 국화가 목란이니, 언젠가 통일이 되면 한반도의 국화로 진달래가 어떨까 상상하던 나로서는 묘한 기분이 든다. 항구 여객터미널 앞 벤치에 앉아 한국에서 온 배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저녁 기차를 기다린다. 내일 아침 이른 시각에는 하바롭스크에 도착할 것이다. 그곳도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처럼 고려인들의 삶이나 한인 독립운동사의 자취를 엿볼 수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지만, 내가 이번에 하바롭스크로 향하는 목적은 다른 데 있다. ‘데르수 우잘라’! 나나이족 사냥꾼. 그를 만나기 위함이다. 횡단열차의 쉼표를 고민할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일 먼저 커다란 무게 추를 놓았다. 항구와 기차역 사이는 설렘으로 충만하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