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39년 전 오늘, 존 레논, 우린 존 레논을 잃었습니다. 세계의 위대한 피스메이커, 위대한 영혼, 존 레논.” 암전된 무대, 수천개 핸드폰 불빛이 곡 ‘Pride(In the Name of Love)’ 후렴에 맞춰 흩날릴 무렵. 보노가 1970년대 뉴욕 반전 평화운동에 앞장 선, 그 전설에 관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뉴욕 밖에서 우린 그 소식을 접했어요. 그러나 여전히 그를 느낍니다.”
마틴 루터 킹 추모곡 ‘Pride’의 날짜, 장소(이른 아침 4월4일, 멤피스 하늘)가 존 레논 기일에 맞춰 개사(‘늦은 밤, 12월8일/ 뉴욕 시티에서 총소리가 났네’) 되자 2만8000여 관객이 들끓기 시작했다. 래리 멀렌 주니어의 고동치는 드럼에 맞춰 떼창이 시작될 때, 가로 64m, 세로 14m 크기 대화면에 ‘꿈’, ‘평등’, ‘진실’, ‘약속’과 같은 단어가 줄지어 흘렀다. 아파트가 가로로 뉘인 듯한 이 대화면은 이내 빨간 빛을 분사하며 이날 가장 성스러운 순간을 만들어 냈다.
8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아일랜드 출신 세계적인 록밴드 U2의 첫 내한 공연. 사진/라이브네이션 코리아
“테러의 시대, 관용을 간직합시다. 공포의 시대, 신의를 간직합시다. 정의, 기쁨, 사랑, 그것이 바로 우리의 커뮤니티, 커뮤니티.”(보노)
8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아일랜드 출신 세계적인 록밴드 U2의 첫 내한 공연. 이날 이 역사적인 공연의 최대 변곡점이자 백미는 멤버들 등장 20분 만인 바로 이 순간이었다.
암전 속 불빛에서 핀 존 레논과 평화 메시지가 압도적 빨간 광경으로, 다시 반짝이는 조슈아 트리로 번져 갔다. 곧 대화면 빨간 섬광이 걷히며 회색 구름 밑을 질주하는 도로로 화면 전환. 영롱하게 서걱거리는 디엣지의 기타가 모하비의 깊은 사막을 밀어내는 햇살처럼 다가왔다.
삶의 굴레를 벗어나 광활한 자유를 갈망하는 U2가 여정에 본격 돛을 올렸다. ‘거리 이름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는 세상과 성별, 종교, 출신, 부에 따른 구별 없는 천상 같은 시공으로.’(곡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8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아일랜드 출신 세계적인 록밴드 U2의 첫 내한 공연.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43년 간 멤버 교체 없었던 이들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록의 역사였다. 중저음과 야수 같은 비성을 교차하는 보노(59·보컬)와 음 딜레이 기법으로 U2 만의 몽환성을 불어넣는 디엣지(58·기타), 펄떡이는 비트로 중심을 잡아주는 래리 멀렌 주니어(58·드럼)와 애덤 클래이턴(59·베이스).
60세를 앞두고도 2시간 20분 가량 진행된 공연에서 이들은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얼굴의 깊은 주름에도 소리는 ‘영생’처럼 다가왔다. 인권·반전·환경의 범지구적 메시지는 이날도 반세기를 관통하며 국경을 몇 개나 넘었다. 시청각 효과를 버무린 이 종합 예술 같은 공연으로 이들은 자신들이 왜 세계적인 밴드인지 답을 대신했다.
이날 저녁 7시22분경, U2는 “우리와 우리 음악은 소개할 필요도 없다”며 무대에 올랐다. 첫 곡은 1972년 1월30일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발생한 시민 학살 사건 ‘피의 일요일’을 소재로 한 ‘Sunday Bloody Sunday’. 군화소리를 연상시키는 주니어의 드럼만으로도 현장은 43년 긴 기다림이 이뤄진 순간을 뜨겁게 만끽했다.
U2 멤버들. 디엣지(왼쪽부터), 래리 멀렌 주니어, 보노, 애덤 클래이턴.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등장 후 20분까지는 ‘I Will Follow’, ‘New Year's Day’, ‘Pride’ 같은 대표곡들로 내달린 1부격으로 볼 수 있었다. 절반의 암전 상태로 진행된 이 때는 대화면을 활용하지 않아 오로지 ‘실물’ U2를 보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손톱만한 크기였지만 발차기를 하며 노래하는 보노와 무대 여기저기를 종횡하는 멤버들 움직임에 관객들이 입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빨간 섬광을 지나 ‘The Joshua Tree’ 전곡 실연에 들어서며 이들 공연은 경이에 이르는 경험이 됐다. 도로를 달리는 영상으로 시작된 이들의 여정은 광활한 미국 대자연을 비추더니 인종, 성별 구분 없이 군용 헬멧을 메는 장면으로, 현란한 색의 죠슈아 트리로 시시각각 변했다. 스크린에 길고 웅장하게 분사된 이 종합예술은 단순한 관람 수준을 넘어 촉각적 체험에 가까운 전율을 일으켰다. 밴드의 가장 유명한 곡 ‘With or Without You’ 순서 때 길게 늘어뜨린 그 절경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황량한 산맥 위를 가르던 서광, 타임리스 기법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햇빛의 각도들, “With or Without You”를 쏟아내는 보노의 절창과 관객들 함성의 맞물림…. 단순한 관람을 넘어 머릿털이 쭈뼛서는 체험이었다.
8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아일랜드 출신 세계적인 록밴드 U2의 첫 내한 공연. 사진/라이브네이션 코리아
높은 천장의 돔 특성상 음의 딜레이나, 울림 현상이 종종 발생되는 건 아쉬웠다. 아담과 주니어의 리듬 파트는 상대적으로 센 보노와 디엣지의 멜로디 파트에 쉽게 묻혔다. 특히 기타에 공간감을 주거나 시간을 지연시켜주는 모듈레이터 이펙터들이 맨 앞에서, 아담의 베이스 중저대역을 지워버리는 일이 잦았다.
43년 만에 밟은 한국 땅에서 밴드는 ‘한국 맞춤형 메시지’를 전했다. 앙코르 곡들을 배치한 3부격에서 울림 세기는 강해졌다. 최근 숨진 설리부터 인류무형문화유산 해녀,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 등의 얼굴이 등장했고(‘Ultraviolet’), 고국 아일랜드의 아픔을 남북으로 나뉜 우리 현실에 빗대 위로했다.(‘One’) 김혜순, 최승자 시인의 시어가 흐르던 공연 직전부터 마지막 태극기가 내걸리고 “감사합니다”란 어설픈 보노의 한국말이 퍼질 때까지, U2는 한국을 연주하고 노래했다. 사상 첫 내한 공연, 이들은 역사를 새겼다.
공연 주최 측 관계자는 “한국을 상징하는 인물과 관련 영상 제작은 U2 측이 직접 진행했다”며 “소셜을 통해 직접 팬들의 의견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공연 말미 대화면에 태극기를 내건 U2. 사진/ⓒRoss Stewart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