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히치하이크가 가져온 대화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없게 된 나에게 히치하이크를 권하면서 딸쯰건축민속박물관 기념품점 직원이 말했다. “저는 어제도 그렇게 갔어요.” 이르쿠츠크에 사는 그녀가 퇴근 후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히치하이크가 즐거운 추억이 될지, 위험한 모험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된다. 하지만 쑥스러움에 여전히 쭈뼛거리며 미처 손을 들지 못한 채 비 내리는 도로로 나서는데, 그 순간 놀랍게도 승용차 한 대가 내 앞을 지나자마자 곧 멈추어 서는 게 아닌가! ‘설마?’ 반신반의하며 다가가니 운전석의 러시아 여성이 쾌활하게 타라고 한다.
기념품점 직원의 말을 상기한다면, 이곳을 지나가는 이르쿠츠크 자가운전자들이 불편한 교통 상황을 감안해 차가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관례적인 호의일 수 있지만, 나로서는 매우 운 좋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뒷좌석에 어린 두 딸을 태우고 이르쿠츠크의 집으로 가던 라리사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잡았다. “러시아는 땅이 넓고 다양한 민족들이 살아서 종교도 다양해요. 그래서 화합을 잘 하지 못하지요.”
히치하이크를 위해 딸쯰건축민속박물관 입구 앞 도로로 나서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소련과 소련 이후에 대한 어떤 단상
사실, 그녀가 지적한 것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여러 다민족 국가들이 겪는 문제다. 그러나 소련 시절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던 ‘소련인’들은 큰 갈등 없이 평화롭게 살았다. 물론 발트 3국처럼 강제 편입된 역사로 인해 불편한 관계가 없지 않았고, 스탈린 시기 여러 민족들이 당했던 강제 이주의 이면에는 차별도 존재했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번창하게 된 것은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이상으로 통합되어 있던 소련인들이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각각의 민족으로, 종교로 돌아간 탓이 클 것이다.
1993년 1월 이르쿠츠크에서 카자흐스탄을 거쳐 우즈베키스탄으로 갔을 때 짧은 시간 동안 두 나라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카자흐인들은 러시아인처럼 러시아어를 구사한 반면, 우즈베크인들의 러시아어는 확연히 구분되었고 길거리에서 러시아어는 이미 잘 들리지 않았다. 종교성도 우즈베크인들이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후자가 소련 사회에 덜 동화되었던 게 아닐까?’ 당시 문득 스쳤던 생각이다.
하긴 어떻게 수천 년간의 문화와 언어, 종교가 쉽게 사라지겠는가. 사회주의 70년간 소련 사회의 한쪽 뒤편에 감춰져 있었을 뿐이다. 소련 해체 후 정교 신자 역시 중년·노년 여성을 중심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라리사 씨는 자신의 종교가 정교라고 밝혔지만, 독실한 러시아 정교 신자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보수성이나 슬라브 민족주의 성향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정교가 러시아의 문화·역사 속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딸쯰건축민속박물관 내 일림스크 요새의 작은 예배당 안 모습. 십자가에서 러시아 정교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사진/필자 제공
불타는 시베리아의 숲
우리의 대화 주제는 날씨로 옮겨갔다. “이르쿠츠크 북쪽으로는 화재가 나고 남쪽으로는 홍수가 나서 난리예요.” 6월 말 뚤룬을 필두로 시작된 홍수가 7월 말 이르쿠츠크 주의 남쪽 지역 곳곳을 할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라리사 씨의 전언에 따르면, 이르쿠츠크 시의 북쪽 타이가도 몇 주째 불타는 중이라는 것이다. 7월 초에 시작된 시베리아 화재의 면적은 7월 말 이미 3백만 헥타르를 넘어서서 러시아 언론이 벨기에의 크기에 맞먹는다고 비교하기도 했다.
바이칼 호수의 일부인 '작은 바다'에 있는 오고이 섬. 이 섬에서 바라본 바이칼의 '작은 바다'는 타이가 화재로 인해 온통 뿌옇다. 사진/필자 제공
푸틴 대통령 왈, ‘산림을 돌보려면 돈이 들어 이익이 안 되니 그냥 타게 놔두라’ 했다고 말하면서 라리사 씨가 그를 비판한다. 아니 무슨 그런 말이 다 있단 말인가? 나중에 기사들을 찾아보니 그녀가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었다. 2014년 7월 8일 자연자원 및 환경부는 ‘산불 진화 규정 비준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만일 산불이 주거지를 위협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예상되는 화재 진화 비용이 예상 피해액을 초과한다면, 지역 당국은 2015년부터 ‘통제 구역’에서 난 산불을 끄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다.
내가 라리사 씨를 만난 것은 2019년 7월 29일, 푸틴은 7월 31일에서야 국방부에 시베리아 산불 진화를 지시했다. 앞서 비상사태 선포를 요구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탄원이 있었지만 러시아 하원은 이를 거부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야 이르쿠츠크 주와 크라스노야르 지방 전체, 부랴트 공화국 일부와 야쿠티야(사하 공화국) 일부 지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연이어 푸틴의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시베리아 숲의 화재는 9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2019년 12월 11일 푸틴은 ‘통제 구역에서 산불을 끄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이익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해 7월 28일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지사 알렉산드르 우스가 발표한 의견―사람들과 주거지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통제 구역에서의 화재 진화는 경제적으로 불이익이다―을 지지한 것이다. 라리사 씨가 푸틴의 말이라고 전한 것은 아마도 이 주지사의 말이자 앞서 언급한 자연자원 및 환경부의 명령이지만, 결국은 푸틴의 생각을 반영한 푸틴 행정부에서 나온 말이라 하겠다. 푸틴은 ‘타이가의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재를 진압하는 것은 비용이 매우 많이 든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르쿠츠크 시도 비에 젖어 있다. 사진/필자 제공
“기후가 이상해졌어요. 이르쿠츠크에도 5일째 쉬지 않고 비가 오고 있어요.” 라리사 씨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상 기후의 원인이 인간의 탓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매년 일어나는 산불이라지만 이번에는 숲이 더욱 심하게 불탔다. 타이가의 불이 이르쿠츠크 주에 일어난 홍수에 영향을 미쳤다는 기사도 보인다.
“태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차에서 내렸다. 이르쿠츠크 시내는 여전히 비로 젖어 있다. 시베리아의 숲이 타면서 연기가 볼가 강 지역과 카자흐스탄, 더 멀리는 알래스카까지 갔다더니, 나는 그 화재의 흔적을 다음날 잿빛의 바이칼과 알혼 섬에서 여실히 확인하게 되었다.
알혼 섬으로 가는 길
바이칼 위에 떠 있는 큰 섬, 알혼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이르쿠츠크 버스 정류장에 모여든다. 그 전날 터미널에서 7시 15분 공영버스 표를 미리 사두었지만 큰 버스가 아니라 사설버스와 같은 미니버스가 들어온다. 승강장 번호를 버스 타기 직전에 방송으로 알려주니 러시아인들도 우왕좌왕하며 서로 묻고 있다. 15분차보다 먼저 도착한 후속 차에 승객들이 몰렸다가 우르르 돌아오기도 했다. 15분차는 떠날 듯 말 듯 하더니 터미널 주변 도로에서 한 쌍을 태워 빈자리를 다 채우고 결국 36분에 출발했다.
이르쿠츠크에서 알혼 섬으로 가는 길에 들른 휴게소. 부랴트 양식의 건물 지붕이 우리의 기와집 지붕을 연상시킨다. 사진/필자 제공
운전기사는 몹시 선량해 보이는 얼굴의 부랴트인이다. 그런데 내 옆 좌석에 앉은 부랴트 청년이 전날 밤 과음을 했는지 졸면서 계속 내 쪽으로 기울어져 기대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처음에는 정중히 부탁하고 나중엔 몇 번을 경고해도 통 소용이 없어 결국 큰 소리로 외쳤다. “좀 바르게 앉아 가요! 몇 번을 말합니까!” 내 소리를 듣고 부랴트인 기사가 그를 나지막이 타이르는데, 내게는 조용하던 그가 자신보다 훨씬 나이 든 기사에게는 큰 소리로 화를 낸다.
몇 시간 그 상태로 피해를 보면서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성질을 내기는 했지만 나중에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소리를 지른 후 1인 좌석에 앉아 있던 러시아 청년이 그와 자리를 바꾸어 주었는데, 숙취에 절은 그 부랴트 젊은이가 옆에 기댈 사람이 없으니 졸다가 버스 바닥으로 꽈당 넘어진 것이다. 안쓰러운 마음에 나도 러시아 청년도 그를 일으켜 준다. 문득 내 미안한 마음의 근원에 놓인 뭔가를 알 것 같다. 작은 버스 안 나는 유일한 외국인(한국인)이었고 그와 운전기사는 부랴트인이었으며, 나머지 승객들은 모두 러시아인이었다. 그가 외국인인 나와 러시아인에게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자기 동족에게 큰 소리를 친 이유도 알 것 같다. 나는 나의 작은 불편함 때문에 그에 대한 ‘인간적인 존중’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이르쿠츠크에서 알혼 섬으로 가는 길에 있는 휴게소 식당 안에는 몽골계인 부랴트인들의 모습을 그린 천이 장식되어 있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