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기후위기를 알린다며 진보적 시민단체와 대중과학자 몇 명이, 값비싼 크루즈 선을 타고 시민들과 함께 대만까지 강연여행을 다녀왔다. 고급 살롱문화를 통해 기후위기에 저항한다는 생각도 우습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해양오염의 주범인 크루즈선을 타고 기후위기를 알린다는 아이디어 자체의 괴랄함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하는건 사실이지만, 실천의 방식이 모순적이고 비과학적이라면, 그 운동은 정당성을 잃을 수 있다.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은, 사회가 변화가능하다는 관점에 대부분 동의한다. 사회는 변화가능하다. 이 명제가 설득력이 있어야, 진보적 가치에 힘이 실린다. 역사적으로 사회는 변화해왔고, 거시적으로 보면 세상은 분명히 좋아지고 있다.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뚜벅뚜벅 세상은 진보한다. 진보의 가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추동력들 중 하나다. 인간을 움직이는 관념 체계의 하나로서도, 진보적 가치는 중요하다. 수많은 시인, 소설가, 철학자들이 인본주의자의 기치 아래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는 이유는, 인문학의 인본주의 사상이 진보적 가치에 가장 가깝게 닿아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입진보 혹은 강단좌파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인터넷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주로 대학에서 교수직을 유지하며, 진보적 가치를 글과 강연으로 전파하고 다니는 인문학적 지식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입진보라는 말은 냉소적이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인 시절엔, 바로 그런 교수 지식인들이 권력을 할퀴고 저항하며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 했는데, 작금의 교수란 이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혹은 각종 매체의 지면을 통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훈장질만 늘어놓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입만 나불대고 실천이 없게 변질되어버린 인문학적 지식인사회를 냉소적으로 부르는 단어가 바로 입진보와 강단좌파다.
시민사회운동의 성장은 분명 진보적 가치를 실천으로 승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진보적 실천이 언제나 사회에 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정치세력화되었던 좌파운동권의 그늘 속에서, 진보적 이념은 교조화되었고 교조화된 신념은 평범한 민중의 삶을 지탱하는 상식에서 괴리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교조화된 이념은, 사회를 함께 구성하는 다른 집단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분명 다른 인간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만이 옳고, 타인의 신념은 옳지 않다는 교조적 태도는 진보적 가치를 훼손한다. 지난 세기 한국의 진보운동에서, 그들이 신봉했던 이념은 교조화되었고, 그 교조화된 이념 속에서 진보적 가치는 시민사회와 괴리되어 갔다. 그것이 한국의 진보세력이 자유주의 세력에 밀려 결코 정권을 창출하지 못하는 이유다.
교조화된 진보적 운동은, 때로는 신비주의로 때로는 반과학주의로 나타나 많은 이들을 당황시킨다. 한 때 진보적 가치의 상징이었던 김지하는 어느 순간 생태주의자로 변신했고, 신비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우경화되었다. 생태주의에 빠져 환경운동에 뛰어든 이들에게는, 이상한 반과학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자연을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과학인데, 자연에 더 가깝게 살아가고자 하는 환경주의자들은 과학에 거부감을 보인다. 이런 아이러니가 생겨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양차 세계대전과 핵폭탄이라는, 인류가 겪은 가장 참담한 비극에 대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반성이, 어느새 과학기술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났고, 그런 조류가 환경운동에 스며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진보주의는 과학에 적대적이다.
진보주의 세력이 한국사회에서 의제를 선점하지 못하고 민중과 괴리되어 겉도는 이유는 현장과의 접점에서 나타나는 실천의 부재 때문이다. 생활의 현장에서 정치가 필요한 이들과 함께 걸었다면, 지금처럼 거대 두 보수 양당의 다툼 속에 기생하는 무기력한 정치세력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의 무기력함은 교조화되어 공허해져버린 이념의 정치로 귀결되며, 그들의 반과학적 태도 또한 바로 실천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파생물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이익을 교조화하며 동성애 등의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한다면, 진보주의자들은 이념을 교조화하며 공기, 물, 음식과 같은 환경에 종교적인 집착을 보인다. 하지만 현장과의 접점에서 나타나는 실천이야말로 급진적이며 현실적이며 동시에 과학적이다. 진보주의는 현장에서 과학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Woo.Jae.Kim@uottawa.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