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다음 두 편의 시를 읽어보자.
순결한 자만이/ 자신을 낮출 수 있다/ 자신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은/ 남을 받아들인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가장 낮은 곳에 설 때/ 사랑을 안다/ 살얼음 에는 겨울,/ 추위에 지친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 귀가 길을 서두르는데/ 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 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 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 나와 남이 한데 어울려/ 졸졸졸 흐르는 겨울물 소리/ 언 마음이 녹은 자만이/ 사랑을 안다
「눈」 전문
눈이었다고,/ 비였다고,/ 아득한 허공에서부터/ 서로의 존재감을 다투다가/ 서로 양보하지 못하고 다투다가/ 지상에 내려와서 쓴// 저 상처투성이의 삶// 쌓아둘 것이 없다는 듯/ 사라지는데// 오늘 나도 저렇게 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고 있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전문
앞의 인용 시는 오세영 시인의 「눈」 전문이고, 뒤의 것은 필자의 졸시 「진눈깨비를 맞으며」 전문이다. 작품 「눈」이 우리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까닭은 무엇일까. ‘눈’이 하얗게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행위를 포착한 화자가 그 존재의 가치를 낮은 곳에 이르러 녹을 줄 아는 것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인간의 사랑도 그러한 눈의 속성과 같은 관점에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즉, 눈과 인간의 사랑이 낮은 곳에 머무를 때 아름답다는 메시지가 시적 깊이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눈’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내릴 것이다.
「진눈깨비를 맞으며」는 필자가 퇴근길에 진눈깨비를 맞다가, 내리자마자 녹아 없어지는 진눈깨비의 실상을 관찰하며, 허무하게 사라지는 진눈깨비의 소멸을 바라보는 마음, 거기에 더하여, 하루하루의 삶이 진눈깨비의 운명처럼 덧없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시로 옮긴 것이다.
혹여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왜, 지금, 뜬금없이 눈 타령인가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올해 들어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았다는 아쉬움에서 연유한다. 올 겨울에는 진눈깨비는 고사하고 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얼마 전, 눈이 내리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발자국이 겨우 날 정도로 적게 내린 ‘자국눈’이었다. 슬그머니 지나간 무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12일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부터 이번 달 10일까지 주요도시의 적설량을 보면, 서울은 1.1cm로 1937년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적었다고 한다. 물론 서울 외의 주요 지방도 비슷한 적설량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니, 자칫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이 될까 걱정이 앞선다. 이렇게 되면, 시인들의 시에서 중요한 시적 소재였던 눈이 등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하루 종일 눈 대신 비가 내렸다.
눈 내리지 않는 겨울은 쓸쓸하다. 상서로운 눈이란 뜻의 ‘서설(瑞雪)’이라는 말도 눈이 내리지 않으면 쓸 일도 없다. 추억의 저장고처럼 기억되는 ‘눈싸움’이란 것도 아예 자취를 감출 지도 모른다. 눈에는 우리들의 낭만을 자극하는 여러 기운이 내장되어 있다. 첫눈 오는 날,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자고 약속을 했는데, 만약 눈이 오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눈발처럼 백발이 내려앉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눈은 여전히 겨울만이 전해주는 아름다운 편지 같은 것이다. 겨울에는 눈이 와야 그해 농사도 순조로웠다는 옛 어른들의 이야기도 추억처럼 묻힐까봐 허전해진다.
무엇보다 눈이 오지 않는 원인이 ‘지구온난화’라면 더 더욱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올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눈 볼 일이 점차 줄어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함박눈’, ‘도둑눈’, ‘소낙눈’, ‘눈보라’, ‘싸락눈’, ‘첫눈’, ‘자국눈’, ‘진눈깨비’와 같은 눈을 나타내는 예쁜 순 우리말들이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일어난다.
‘코로나19’로, ‘미세먼지’로, 올겨울 대한민국을 감싸고 있는 공기도 우울하다. 눈이 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사계절도 본래의 아름다움과 균형을 잃지 않는다. 이제 눈이 오라고 기원하는 기설제(祈雪祭)라도 지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눈, 참 그립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 일본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