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머나먼 반쪽
‘영원의 불꽃’ 앞 광장에서 보도블록을 교체 중인 노동자들이 북한에서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는 있었지만 얼쩡대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그들 중 몇몇이 나를 힐끗 쳐다본다. ‘에라, 말이나 걸어 보자.’ 망설이던 나는 광장의 양쪽으로 나뉘어 일하던 두 그룹 중 한쪽에게 다가가 일단 러시아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서 있던 노동자가 경계의 눈빛을 띤 채 러시아어로 대답한다. “안녕하세요?” “쎄베르나야 까레이야(북한)에서 오셨나요?”(러시아어이니 ‘북한’이나 ‘북조선’의 구분으로 서로 예민할 필요가 없어 편하다.) “예.” 그의 표정에 경계심이 더 강해졌다. ‘역시…’
확인을 한 나는 이제 우리말로 남쪽에서 왔음을 밝히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묵묵부답이다. 놀랍지 않다. 남북 분단이 70년을 훌쩍 넘긴 지도 여러 해지만, 해외에서 만난 한반도의 반쪽이 다른 반쪽과 말을 나누는 것은 여전히 불편한 일이다. ‘대답을 하다가 멈춘 사람이 상급자일까?’ 더 이상의 대답을 듣지 못한 나는 쭈뼛거리다가 다른 그룹 쪽으로 다가가 굳이 또 말을 걸었다. 한 명은 대답을 않고 외면하는데 다른 한 명이 내 질문에 대답해 준다. 북에서 왔고 공사는 15일간이라는 것. “이국땅에서 동포를 만나니 반가워서 그러누만.” 검게 탄 얼굴의 그가 싱긋 웃으며 내 의도를 해석해 주니 나머지 동료들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목례를 보낸다.
여름날 뜨거운 태양 아래서 종일 고되게 ‘외화벌이’에 복무했을 그들을 보니 1960년대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70~80년대 중동의 해외 건설 현장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던 우리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목마를 텐데 생수를 사다 드릴까? 아니, 일 끝나고 숙소에서 마시게 보드카를 사서 선물할까? 그런데 가게가 안 보이네…’ 동포애의 감성에 젖어 뭔가 하고 싶었지만 그 행동이 결국은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공연한 오지랖’이란 생각에 그만두었다. 그들은 어차피 아무 것도 받지 않을 것이다. 다른 체제의 ‘두 나라’ 사이에 놓인 거리는 여전히 너무나 멀다. 나는 아쉽고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이르쿠츠크 '영원의 불꽃' 앞 광장에서 석양 무렵까지 보도블록을 새로 까는 작업 중인 북한 노동자들. 사진/필자 제공
모스크바에서 마주친 ‘먼 나라’ 유학생들
1990년대 초, 소련의 ‘형제 국가’들에서 온 유학생들이 점점 사라질 때 북한에서 온 유학생들도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북한 학생들의 경우 새로이 내게 된 학비뿐만 아니라 남한 학생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환경의 변화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들도, 우리도, 서로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마주치거나 대화하는 것을 피하고 조심했다. 해외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외국인들, 여러 나라의 유학생들 중 서로 가장 접촉을 꺼리는 사이가 아마 남북한일 것이다. 1992년 2월 모스크바로 떠난 지 몇 달 후, 안기부에서 전화를 해 내가 정말 모스크바에 있는지 확인했다고 서울의 새언니가 전해 주었다. 물론 개인적인 전력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아직은 그런 시절이었다.
국내의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 어떻게 엮일지 모르니 남북한 출신이라면 항상 조심하고 서로를 경계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우연찮게 스쳐 지나가는 경우는 있었다. 그들과 관련해 내게 매우 인상적으로 남았던 기억은 러시아어이다. 어느 날 몇몇 북한 유학생들이 러시아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내가 본 어떤 남한 학생들보다 러시아어를 잘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어학 전공자도 아니었고 과학도들이었는데 러시아어를 러시아인처럼 구사했던 것이다! 순간 나는 북한 사회의 어느 면보다도 외국어 교육 방식이 궁금해졌다.
로마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 본관 정문. 사진/필자 제공
20대의 우리들보다 나이가 좀 더 많았던 그들은, 후에 한 후배가 전한 바에 따르면, 모두 처자식을 북에 두고 온 사람들이었다.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인재를 선발해 유학을 보낸 것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들은 정기적으로 대사관에 불려가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다. 얼마 후 그들은 학업을 마치고 북으로 돌아갔고 더 이상 북한 유학생들을 마주칠 기회는 없었다.
그때로부터 27~28년의 세월이 흘렀고 남과 북에도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이 많아졌고, 그 유형도 90년대 중후반 식량난으로 인한 ‘생계형’에서 2000년대 이후 보다 나은 삶의 질과 자녀 교육을 위해 한국행을 택하는 ‘이민형’으로 바뀌었다. 최근의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중산층 이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변화들 속에서도 해외에서 만나게 되는 남북한의 주민들은 여전히 서로에 대한 경계와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물론 현재의 여건상 북쪽의 사람들이 남쪽의 사람들보다 더 경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2009년경, 조금 다르면서도 유사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다. 나는 당시 오랜 대학 강사 생활을 접고 프랑스로 건너가 다시 늙은 유학생이 되어 있었다. 한국학 전공자인 한 프랑스인 교수의 조교 일을 아르바이트로 시작할 즈음, 나는 전임자인 조교와 함께 국정원 요원이 마련한 식사 자리에 나가야 했다. 우리와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북한 학생이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모스크바에서 보았던 북한 유학생들과는 달리, 그는 미혼의 젊은 청년으로 북에 두고 온 처자식도 물론 없었다. 그는 눈치를 보지 않고 남한 학생들에게 스스럼없이 활달하게 말을 건넸고 우리도 그를 착한 친구라 여기며 편하게 대했다. 세월이 흘러 남북의 세상도 좀 달라졌나보다, 했다.
그러나 국정원 요원은 ‘조교’를 불러냈고(비록, 걱정을 한 전임 조교가 신임 조교를 대동하면서 그 국정원 요원도 신임 조교에게 한소리를 들었지만), 한국학 전공의 프랑스인 교수들은 우리들에게 그 북한 학생과 거리를 두라고 주의를 주었다. 우리에게 다 말하진 않았지만 교수들 역시 뭔가 주의를 받았을 거라고 남한 학생들은 추측했다. 그 북한 유학생이 썩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던 걸 보면 그가 고위급 자제라는 소문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을 듯싶다.
로마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 본관으로 들어가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영어 대화를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사진/필자 제공
눈꽃 속의 이르쿠츠크 사람들
2019년 여름의 이르쿠츠크 거리를 걸으며 1993년 초 겨울의 이르쿠츠크 모습을 더듬는다. 하얀 눈꽃 속에 파묻힌 예쁜 집들과 집집마다 다른 무늬의 창문들, 한산한 거리 한쪽에서 뿜어져 나오던 축제 분위기, 너무 동화 같아서 현실감 없이 뇌리에 박힌 기억의 중심에는 여러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거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어린 소녀가 있고 키 큰 청년이 있고 실내에서 즐겁게 춤추던 어린이들이 있다.
27년 만에 이르쿠츠크의 사진을 찾았다. 1993년 1월 7일 성탄절을 맞아 축제 현장에 나온 이르쿠츠크 시민들의 모습. 사진/필자 제공
이르쿠츠크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1993년 새해 연휴와 러시아인들의 크리스마스인 1월 7일이 이어질 때였다. 러시아 정교회는 율리우스력을 따르기 때문에 그레고리력을 따르는 로마 가톨릭의 크리스마스(12월 25일)보다 13일 늦은 1월 7일이 성탄절로 축하된다. 시민들은 가족끼리 모여 집에서 긴 새해 연휴를 즐기거나, 축제의 현장으로 나와 크리스마스트리, 제드 마로즈(‘서리 할아버지’), 얼음 조각을 비롯한 갖가지 조형물들과 눈꽃을 즐기고 있었다. 슬라브 민족의 산타클로스인 제드 마로즈는 순록이 아니라 세 마리의 말이 끄는 썰매를 탄다. 그의 동행자는 루돌프가 아니라 흰옷을 입은 그의 손녀 스녜구로치카(‘눈 소녀’)이다.
아마도 새해라서 달랐을 것이고 이르쿠츠크에도 어려움이 없을 리 없겠지만, 늘 힘겨운 삶을 거리에서 봐야 했던 모스크바의 암울함과는 대조적으로, 내게는 이르쿠츠크가 하얗고 밝게 빛나 보였다. 연휴라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길거리에서 빵 하나 살 곳이 없어 배가 몹시 고팠다. 걷다 보니 어딘가에서 신나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소리에 이끌려 무작정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어른들도 박수를 치며 함께 어울린다. 탁자 위에 놓인 과자들과 음료수가 눈에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여기는 무얼 하는 곳인가요?” 20대의 패기와 여행안내서 한 권을 가슴에 품고 내가 불쑥, 그러나 미소로 끼어들며 슬쩍 물었다.
1993년 1월 7일 성탄절을 맞은 이르쿠츠크의 모습. 크리스마스트리 옆에 계유년의 닭이 서 있고 말이 끄는 썰매를 탄 사람들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쓰인 현수막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