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데뷔 25년차인 밴드 크라잉넛은 올해 8월을 목표로 베스트 앨범을 준비 중이다. 100여곡에 달하는 자작곡 중 16곡을 솎아 구성한다. 원곡 그대로의 느낌에 숙성된 ‘세월’ 만을 얹는다. 각 앨범의 주요 타이틀곡을 비롯해 시대상이 담긴 곡, 녹음이 아쉬웠던 곡을 추려냈다.
23일 오후 4시 ‘드럭레코드’ 사무실에서 올해 데뷔 25주년을 맞은 밴드 크라잉넛[박윤식(메인보컬, 기타), 이상면(기타), 한경록(베이스), 이상혁(드럼), 김인수(아코디언, 키보드)]을 만났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펑크(Punk)는 크라잉넛의 정신과 음악을 구성하는 큰 뼈대다. 너바나가 90년대를 평정하던 시절에도 이들은 섹스피스톨스, 그린데이, 랜시드, 백을 즐겨 들었다. 여기에 산울림, 송골매, 조용필, 들국화가 이어온 한국적 낭만, 아이리시 폴카리듬적 색채, 날 것 같은 목소리, 풍자적 만담을 묘하게 뒤섞었다. 크라잉넛만의 스타일로 창조한 이 장르적 변용은 가히 ‘크라잉너시즘’이라 할 만 하다.
지금까지 걸어온 음악적 길에 대해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말달리자’의 찰진 욕설처럼 거침없는 언변은 역시 크라잉넛이었다. “돌아보면 시작부터 체계적으로 레슨을 다니거나 한 게 아니에요. 거리에서, 클럽에서, 함께 고민하고 연주하고 회의한 결과죠. 그땐 ‘니네 그렇게 음악하면 안돼’ 소리 정말 많이 들었어요. X까 우리식대로 할 거야, 했죠.”(윤식) “드럼은 128비트 쳐야지? X까”(상혁) “그렇게 충고할 시간에 영어 단어를 한 자라도 더 하세요. 그게 남는 겁니다.”(인수)
크라잉넛 김인수(아코디언, 키보드). 사진/드럭레코드
특히 2000년대 초 뒤늦게 합류한 김인수 덕에 음악은 한결 싱그러워졌다. 아코디언과 하모니카, 카주를 도입한 이 생명력 넘치는 폴카 리듬은 청자를 유랑하는 집시나 서커스단 앞에 데려다 준다. 멤버들은 “민속음악적인 향수가 그 때부터 들어온 것 같다”며 “‘중간이 없이 너무 즐겁든지 슬프든지 한 정서’ 측면에선 결국 펑크나 전통음악이 비슷한 요소가 많다”고 입을 모았다.
“포그스(pogues) 같은 아이리시 밴드부터 클래식까지 제 3세계 음악엔 늘 열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음악신에는 늘 유행이 바람처럼 왔다갔지만, 우린 그런 거에 휘둘리지 않았어요. 그냥 우리식대로가 펑크라고 결론냈어요.”(경록)
서울 광흥창 CJ아지트에서 25주년 베스트 앨범 녹음 준비 중인 밴드 크라잉넛. 사진/드럭레코드
멤버들은 “나이가 드니 이제는 컨트리 음악에도 점차 손이 간다”고 했다.
픽업트럭에 몸을 싣고 전국팔도, 세계 곳곳을 유랑하는 크라잉넛을 상상해본다. 주종을 가리지 않는 술병을 목에 걸고 기타부터 세계 민속악기들을 들쳐 메고. 펑크와 홍키통크를 버무린 크라잉넛 만의 음악. 이거 상상만으로도 ‘좋지 아니한가’?
이들은 음악에 술이 빠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삶의 반이 술이기 때문”이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마시자 마시자 술을 쫙쫙 마시자’(‘마시자’)란 해적단 같은 가사도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최근 세계로 뻗어나간다고 집중조명 받는 케이팝은 대다수 아이돌 음악에 편중됐지만, 따지고보면 세계 음악시장 진출의 활로를 먼저 뚫어준 건 이들이다. 2005년 스웨덴 우드스톡이라 불리는 ‘셸에프테오 트라스탁 페스티발렌’에 선 것을 시작으로 지구를 꾸준히 돌았다. 미국, 독일, 태국, 몽골, 호주, 일본, 중국…. ‘비틀스의 나라’ 영국 공연을 마치고 마돈나, 핑크 무대를 눈앞에서 본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다.
“동양인이 우리밖에 없는 영어권 국가를 가면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참 좋아요. 신기하게 스킨헤드족들도 몰려오고요.”(경록) “한국 말인데도 다 같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음악으로 정말 하나될 수 있구나 느껴요. 한번은 100년도 넘은 미국 클럽에서 공연하는데 저희 순서 때 술이 동났다고. 그 말 듣고 ‘해냈구나’ 싶었어요.”(윤식) “해외 공연에선 술 판매량으로 그날의 라이브 순위를 매기더라고요. 우리 스타일이에요.”(상면)
서울 광흥창 CJ아지트에서 25주년 베스트 앨범 녹음 준비 중인 밴드 크라잉넛. 사진/드럭레코드
최근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으로 크라잉넛 역시 해외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를 겪고 있다. 지난 3월 일주간 예정이던 일본 공연은 입국 전날 공연 비자가 취소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아쉽게나마 일본 현지 밴드들이 기획한 무관중 생중계 공연에 동참했다. 인터뷰가 있던 이날은 인천에서 무관중 공연을 막 달리고 온 참이었다. 이들은 “코로나 19로 공연이 취소되고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갑갑하다”며 “음악과 공연이 소중하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다.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음악은 너무 재밌다”고 했다.
오프라인 공연이 사라지면서 밴드는 미리 준비하던 25주년 베스트 앨범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드럭레코드와 광흥창 CJ아지트 튠업 스튜디오를 오가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최근에는 옛곡을 돌아보며 ‘크라잉넛 챌린지’ 온라인 행사도 시작했다. 일반인부터 뮤지션들까지 크라잉넛의 명곡을 재해석한 영상이 해시테그를 달고 퍼져가고 있다. 특히 조동희, 사우스카니발의 ‘밤이 깊었네’는 영화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을 연상시키는 영상미가 압권이다. 영상을 타다보면 자연스레 크라잉넛 음악이 지닌 파급력도 생각하게 된다.
“저희 노래는 일단 굉장히 쉽다는 게 장점인 것 같아요. 귀에 쏙쏙 꽂히는 멜로디들 때문이 아닐까…. 그건 저희들에 앞선 선배들 영향이 크죠. 산울림만 봐도 그렇죠. ‘산 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산울림 ‘산할아버지’) 이거 끝내주잖아요.”
서울 광흥창 CJ아지트에서 25주년 베스트 앨범 녹음 준비 중인 밴드 크라잉넛. 사진/드럭레코드
마지막으로 30일 새롭게 나온 ‘밤이 깊었네’를 여행지에 빗대달라고 요청했다.
“9월 이후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볼 것이라곤 오로라 뿐. 블랙메탈의 성지.”(인수) “이걸로 끝 아닌가요? 푸하하하.”(모두)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