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성휘 기자] '바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추도식이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엄수됐다. 고인이 꿈꿔온 '사람 사는 세상',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은 노 전 대통령의 평생 친구이자 동료인 문재인 대통령이 이어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9월1일 경남 진해에서 출생했다. 1966년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이후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고졸 출신 변호사다. 이후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법무법인 '부산'을 차리고 세무·회계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1981년 10월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로 각성했다. 문 대통령과의 인연도 이때 시작된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1988년 4월 제13대 총선에서는 부산 동구에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정치인 노무현'이 된다. 같은 해 12월에는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정치 대부였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주도한 '3당 합당'에 반대해 통일민주당에 잔류했고, 연거푸 선거에 낙선한다. 그렇지만 지역주의의 벽에 도전하는 그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감동을 줬고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의 탄생과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승리로 이어진다.
'대통령 노무현'의 정치 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가족 및 측근 비리 논란과 열린우리당 분당을 거치며 국정 동력은 임기 초반부터 약화됐고, 2004년 제17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취지의 발언을 해 탄핵 소추를 당했다.
그를 지켜준 것은 국민들이었다. 탄핵역풍으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17대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사학법) 개정안, 언론개혁법안, 과거사진상규명법(과거사법) 등 소위 '4대 개혁'은 여당의 내부 분열과 야당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했다. 지방분권을 위한 행정수도 이전도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임기 초반 검사들과 직접 토론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던 검찰 개혁 역시 좌초했고, 종합부동산세는 '세금 폭탄' 논란만 낳았다. 다만 임기 동안 지속된 탈권위와 소통 행보,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 등 남북화해 노력, 임기 중 국방력의 비약적 상승 등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임기를 마친 '자연인 노무현'은 퇴임 후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고향 자택으로 내려갔고, 국민들과의 직접 소통을 즐겼다. 그러나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의 집요한 수사를 받는다. 검찰과 이명박정부 국가정보원의 노골적인 망신주기에 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5월23일 자택 뒷산인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해 서거한다.
이명박·박근혜정부를 거치며 시들어가던 고인의 꿈은 '평생의 친구이자 동료' 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다시 피어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검찰의 기소권 및 수사권 독점을 견제하는 공수처법이 지난 1월 국회를 통과했고, 법무부의 비검찰화 역시 진행되고 있다.
4대 개혁 중에도 계승되는 정책이 있다. 과거사법의 경우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활동으로 이어졌고, 참여정부 당시 조사한 바 있는 'KAL기 사건'도 재조사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사립유치원의 회계 투명화 정책은 올해 '에듀파인' 도입으로 현실화 됐다. 사학 개혁도 문재인정부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노 전 대통령 당시 사스(SARS) 방역으로 대표되는 재난대응 능력은 문재인정부로 고스라니 계승됐다. 코로나19 방역, 즉 'K-방역' 은 전 세계의 표준이 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취임 3주년 연설에서 "우리의 방역과 보건의료체계가 세계 최고 수준임을 확인했다"며 "사스와 메르스 때의 경험을 살려 대응 체계를 발전시켜온 결과"라고 자평했다.
23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대통령묘역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공식 추도식에서 노 전 대통령의 생전의 모습이 대형스크린에 상영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성휘·신태현 기자 noirciel@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