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광연 기자] 미국과 중국의 2차 무역전쟁이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이를 바라보는 국내 기업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어느 한 나라를 꼭 집을 수 없는 살얼음판의 시간, 전문가들은 상황에 맞게 매 순간 양국을 상대하는 '줄타기 전략'만이 살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25일 외신 등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은 홍콩 내 반정부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제정을 시사한 '홍콩보안법'을 놓고 맞붙었다. 미국이 이를 강행할 경우 홍콩에 대한 관세혜택 등 특별지위를 박탈할 수 있다고 경고하자 중국은 "내정 간섭"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지난주 "미국 기술이 들어간 반도체를 중국 화웨이에 공급할 시 허락을 받으라"는 미국의 선포에 중국이 거세게 들고일어난 데 이어 양국의 다툼에 한껏 불이 붙는 모양새다.
이러한 양상이라면 지난 2018년 촉발한 1차 무역전쟁 이후 양국이 올해 1월 도출한 '1단계 무역합의'도 파기될 수 있다는 전망마저 나온다. 1단계 무역합의란 내년까지 중국이 농산물을 포함해 미국산 제품 수입을 대규모로 확대하는 대신 미국은 당초 계획했던 대중 추가 관세 부과를 철회하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한다. 사실상 1차 무역전쟁을 겪은 양국의 '휴전 선언'이었다.
중국을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나란히 지난 2017년 11월9일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을 걷고 있다. 사진/AP·뉴시스
다만 최근 리커창 중국 총리가 1단계 무역합의를 이행할 것이라고 시사하는 등 당장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김흥규 아주대 중국정책연구소장(정치외교학과 교수)은 "중국으로서는 아직 내년까지 시간이 남아 있고 미국보다 먼저 국제적 합의를 깬다는 느낌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바로 룰을 깨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다만 코로나19 등으로 원자재 가격 등이 상승해 처음 약속을 지키려면 현재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된 것은 부담"이라고 설명했다.
두 열강의 갈등으로 인해 세계 경제는 이미 크게 요동치고 있다. 최근 세계 증시는 오름과 내림이 반복해 불안정한 흐름을 뜻하는 '혼조세'로 마감하고 있고 국내 증시도 상승세가 한풀 꺾였다. 경제 정상화에 대한 기대 등으로 요즘 꾸준한 상승세를 타던 국제유가도 마찬가지다. 22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7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전날보다 배럴당 0.67달러(1.98%) 떨어진 33.25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서로를 때리는 미중과 이에 영향을 받아 침체하는 세계 경제를 바라보는 국내 기업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전체 명목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무역의존도가 2018년 기준 70.4%에 달하며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의 1, 2위 수출국이 다름 아닌 중국과 미국이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우리의 대미·대중 수출의존도는 각각 13.5%, 25.1%에 달할 정도로 높다.
지난해 2월1일 평택항 야적장에 차량과 컨테이너가 수출을 대기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미 기업들은 1차 무역전쟁으로 톡톡히 대가를 치렀다. 한국무역협회와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지난해 1~8월 누계 세계수출액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9%에 그쳤다. 2009년부터 계속 유지해온 3%대가 깨진 것으로 1차 무역분쟁으로 인해 지난해 수출증감률에서 계속 마이너스 행진을 벌인 결과였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난해 총교역량이 2018년 대비 약 9% 감소하는 등 1차 무역전쟁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라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탈중국 경제동맹인 경제번영네트워크 가입을 고려해달라"는 미국과 "미국의 조치와 상관없이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해달라"는 중국 어느 편에도 설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미중 모두 "서로 내 편이 돼달라"고 손을 뻗고 있으나 우리로서는 무역전쟁 파급효과가 이미 1차 때 증명됐기에 선뜻 양자택일할 수 없는 분위기인 것이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최근 "미중 간 갈등이 격화되고 있어 고민스럽다"라고 토로하고 미국의 화웨이 때리기 직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중국 출장길에 나선 것은 양국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진 최근 우리 현실을 설명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8일 중국 산시성 시안의 반도체 사업장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와 기업이 양국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실리 스탠스를 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형국이지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김 소장은 "미국과 중국이 싸우는 것일뿐 친미나 친중과 같은 신냉전 프레임으로 가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며 "미중 외에 우리와 처지가 같은 나머지 국가들과 연대하면서 신중하게 상황을 읽고 조정해갈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과거 사고방식에 집착하거나 너무 '용감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도 "양국에 각각 안보와 경제 의존도가 높은 우리로서는 정말 눈치를 많이 보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라며 "두 나라 사이에서 상황마다 줄타기와 같은 신중한 밀당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도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전부터 중국과 경쟁하던 산업들에 긍정적인 요소가 생긴 것이지만, 국내 산업 전반에 걸쳐 중국과 연결되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다 보니 피해가 불가피하다"며 "글로벌 경제의 핵심 역할을 하는 미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광연 기자 fun35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