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36화)모스크바 사진첩

입력 : 2020-09-21 오전 12: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1992년 5월1일 레닌 언덕에서 내려다본 모스크바 전경. 사진/필자 제공
 
90년대 기숙사의 변화
 
나는 오래 전에 살았던 기숙사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기숙사가 있는 모스크바 국립대 본관은 ‘스탈린의 마천루’, 이른바 스탈린 양식의 ‘7자매’라 불리는 고층 건물들 중 하나다. 소비에트식 바로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혼합 형태인 이 건물들은 스탈린이 소련의 힘을 보이기 위해 세운 것이다. 원래 모스크바 건립 800주년을 기념해 8개가 세워질 예정이었지만 스탈린이 죽으면서 여덟 번째 건물의 공사가 중단돼 7개로 그쳤다. 7자매는 모두 1947년 9월7일 동시에 기공됐다. 이보다 앞서, 사회주의 승리의 상징물로 건설 중이었던 소비에트 궁전도 1941년 대조국전쟁이 시작되면서 공사가 중단됐는데, 완성됐다면 계획대로 7자매 건물들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스탈린 양식의 '7자매' 중 하나인 로모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학 본관 후면. 레닌 언덕 쪽 모습이다. 사진/필자 제공
 
첨탑을 머리에 이고 웅장한 자태로 서 있는 본관에는 대학 행정 본부와 기계 및 수학부, 지질학부, 지리학부 등이 있었고 건물의 양쪽 날개에 대학원 기숙사가 있었다. 일 년의 절반 가까이 느껴지는 겨울, 잿빛 하늘과 안개 속에서 자태를 드러내는 본관은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가요 ‘마법의 성’을 떠올리게 했다. 90년대의 격변기를 통과하던 러시아 사회의 변화는 기숙사 안에서도 나타났다. 기숙사 방을 배정하는 권력 있는(!) 자리에 젊은 담당자들이 새로 오고 각 층의 당직자들도 교체되자 새 권력자가 마피아 라인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진위 여부를 알 수는 없었다. 곳곳에 뇌물이 판치던 때라 방 배정이든, 고장 수리든, 전화 설치든, 웃돈 없이 일을 처리하려면 아주 오래 기다려야 했다. 
 
사회 시스템 전체가 붕괴하고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있다 보니 기숙사도 흉흉한 일들을 비켜 가지 못했다. 하루는 기숙사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몇 층 창문에서 던졌네, 마피아끼리 싸움이 났네, 하며 또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초저녁 기숙사 후배와 본관 로비를 지나는데 술에 취한 한 러시아인과 시비가 붙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우리의 한국말 대화를 듣고 중국인이라 생각해 화풀이를 한 거였다. 그와 중국인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남자가 내 안경을 깨뜨려 화가 난 내가 물러서지 않자 그가 말했다. “달러를 줄게. 그러면 되지?” “달러라고? 당신은 학생이 아니야, 그렇지?” 내가 받아쳤다. 맙소사, 시험이 코앞인데 안경이 깨지다니! 달러가 있으면 뭐하는가, 물건을 구할 수 없는 시절인데... 안경을 어디서 산단 말인가. 달러 따윈 필요 없으니 사과를 하라는 내 말에 그는 결국 사과를 했지만 그것은 우리가 중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돌아서면서 다시 말했다. “중국인들 다 죽이겠어!”
 
스탈린 양식의 '7자매' 중 하나인 로모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학 본관 정면 모습. 사진/필자 제공
 
거리에는 스킨헤드족이 늘어나고 해가 갈수록 민족주의가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조용하던 기숙사가 차츰 소란스러워져 갔고 학생 아닌 사람들이 들어와 산다는 것도 사실로 보였다. 그러나 학생들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해야 했는데, 아들과 함께 가족기숙사에 살던 러시아 철학과 친구 나타샤는 화장품 외판원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를 ‘누나’라고 부르던 기계·수학부의 두 학생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 종종 굶었고 늘 배가 고파 있어 그들이 내 방에 놀러 오면 나는 일단 밥부터 차리곤 했다.
 
당시 선교 활동을 위해 한국에서 온 개신교 교회들이 끼니를 제공하며 러시아인들을 모으려 했는데, 거기에 다녀온 두 친구의 소감은 이랬다. “그들은 러시아의 역사와 정교 문화에 대해 전혀 몰라요. 우리에게 ‘밥’만 주면 전도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이 두 학생은 한 끼 해결과 호기심 때문에 가긴 했지만 두 번째 끼니를 먹으러 가진 않았다. 기숙사에는 계속 변화가 일어났는데, 일부 층을 리모델링해 ‘호텔’이라 부르며 좀 더 비싼 비용으로(외국인에겐 그래도 저렴했다)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학생들이 거주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옷장 문이 부서져 있고 전구가 갑자기 천장에서 떨어진 적도 있는 정든 내 방에 그대로 남았다.
 
레닌 언덕에서의 회상
 
2019년 8월 레닌(참새) 언덕에서 내려다본 모스크바 전경. 왼쪽에 보이는 루즈니키 스타디움은 올림픽과 월드컵 경기장으로 사용된 곳이다. 사진/필자 제공
 
본관은 예전에도 출입증이 필요했지만 방문자의 경우 입구에서 방문 기록을 작성하고 신분증을 맡기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허가를 미리 받게끔 제도가 바뀌어 있었다. 졸업생이라 말하니 여권과 졸업 학위증 원본을 제시하라 한다. 게다가, 본관을 비롯한 대학 건물들 모두 기차역처럼 입구에 검색대가 설치돼 있어 예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그동안 일어났던 테러의 영향일 듯싶다. 나는 내부를 포기하고 당시 ‘레닌 언덕’으로 불리던 현재의 ‘참새 언덕’(보로비요븨 고릐)으로 향했다. 본관 뒤편에서 레닌 언덕으로 가는 길목에는 로모노소프, 멘델레예프 등 걸출한 학자들과 게르쩬 같은 사상가의 흉상들이 죽 늘어서 있다.
 
1994년 12월17일 모스크바 국립대 본관 기숙사 방에서 내려다본 레닌 언덕 쪽 풍경. 사진/필자 제공
 
레닌 언덕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지대로,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때문에 신혼부부들의 인기 있는 사진 촬영지였다. 빗속 관광객들 사이로 촬영 팀이 보여 물어보니 <모스크바의 비밀>이라는 추리물 텔레비전 시리즈를 촬영 중이라 한다. 소련 시절에도 <만남의 장소는 바꿀 수 없다>(1979년, 5부작, 원작은 바이네르 형제의 탐정 소설 <자비의 시대>) 같은 시리즈 TV영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영화였고, 연속극 같은 개념은 없었다. 1992년 러시아 TV에 방영된 멕시코의 연속극 <부자들도 운다>는 그 엄청난 인기 덕분에 강의 시간에 언급될 정도였다. 높은 수준의 영화 예술 유산을 가진 옛 소련의 국민들이 통속적인 연속극에 열광하던 분위기는 당시의 곤궁한 일상이 낳은 사회문화 현상이기도 했다.
 
모스크바 국립대 본관 후면이 보이는 레닌 언덕에서 텔레비전 추리물 시리즈인 <모스크바의 비밀>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모든 차의 ‘택시’화 시절
 
도로에 나서니 택시들이 보인다. 그동안 급할 때 휴대폰 앱으로 호출했던 얀덱스, 막심 택시 외에, 시티모빌, 겟이라는 택시도 앱으로 이용할 수 있다. 모스크바에서는 물론 지하철만 타고 다녔지만, 90년대의 협상 ‘택시’들이 떠올라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 보통은 자가용을 세워 가격 흥정 후 이동했지만, 사실 개인 승용차 외에도 모든 종류의 차를 택시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경찰차나 구급차도 가능했다. 1992년 여름, 단체 여행으로 모스크바에 오시는 아버지를 마중하기 위해 공항으로 갈 때 나는 버스 하나를 잡아타고 갔는데, 공항에 도착하자 운전기사가 협상한 요금에 더해 내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달라고 해서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택시 호출 서비스 앱으로 이용할 수 있는 얀덱스 택시, 시티모빌 택시가 길에 줄지어 서 있다. 사진/필자 제공
 
거주자가 아닌 방문객의 흥정 ‘택시’ 일화를 하나 들여다보면 이렇다. 1996년 5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레베데프 물리학 연구소에서 개최하는 국제 사하로프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오빠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나를 만나기 위해 오빠는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버스를 타고 모스크바 대학 본관 기숙사를 잘 찾아왔다. 밤에 호텔로 돌아갈 때도 역시 같은 버스를 타고 잘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내방송이 나오더니 버스가 올 때와는 달리 엉뚱한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를 몰라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던 오빠는 당황한 채 버스에서 내렸고, 내가 했던 말이 기억나 무조건 아무 차나 세워 탔다고 한다.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오빠는 승용차 운전자에게 ‘스푸트니크’(호텔 이름)와 ‘아진, 드바’(하나, 둘)라고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숫자 1, 2 표시를 했다. 내가 말해 준 정보를 떠올려 대략의 가격으로 1만2000루블을 부른 것이다. 다행히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지만, 호텔 근처의 유리 가가린 동상이 나타날 때까지는 몹시 긴장한 채였다. 다음날 컨퍼런스에서 그 일을 말하자 러시아 물리학자들이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운이 좋으셨군요!” 1996년 5월 루블화의 환율은 1달러당 약 5000루블 정도였다. 1992년 7월에 1달러가 약 190루블이었으니 루블화의 급진적인 가치 하락 속에 러시아 서민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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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