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 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어떤 이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노란 대문 집과 무지개 스튜디오?’ 현실이 꼭 동화 세계처럼 출렁이는 듯 했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서촌 인근에 위치한 문화공간 내부. 그와 막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참이다.
조동희. 싱어송라이터이자 장필순(‘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 때’)을 비롯 조규찬, JK김동욱, 김장훈 등의 작사가, 고 조동진(1947~2017)과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을 이끈 ‘거장’ 조동익의 동생.
올 여름(약 3개월 간), 노란 대문 집과 무지개 스튜디오(조동익 집·작업실의 별칭)로 시간을 되감는 그를 보며 잠시 ‘회중시계를 지닌 토끼’ 같다고 생각했다.
제주 애월 소길리의 정경이 몽실몽실 동화처럼 펼쳐진다. 노견이 잠들면 새벽 2시부터 불이 켜지던 스튜디오와 “일렉(기타) 줄 갈았다”며 청년처럼 좋아하던 조동익, 잔잔히 흐르던 아이슬란드 음악, 바닷바람, 스쿠터, 오렌지빛 석양 한 줌….
원더랜드에 불시착한 앨리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나누는 우리의 대화가 ‘잿빛도시’ 서울을 멀끔히 지워내고 있었다.
9년 만에 정규 2집 ‘슬픔은 아름다움의 그림자’ 낸 조동희. 사진/최소우주
싱어송라이터 조동희가 2집 ‘슬픔은 아름다움의 그림자’로 돌아왔다. 1집 ‘비둘기(2011)’ 이후 약 9년 만의 정규 앨범. 구상은 1집 직후부터 했으나 “2집부턴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신념에 발목 잡혀 길어졌다. 음악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 그러나 함께 음악적 동행을 자처한 조동익이 한결 같은 느티나무처럼 곁을 지켰다.
“숙성시켜 보자. 이야기가 차오를 때까지.”
올 여름 조동익이 그를 애월로 불러내면서 ‘가속’이 붙었다. 이미 입까지 차오른 이야기들은 세류를 타다 거대 물줄기를 이루며 끝내 삶의 곡조를 움 틔웠다. 2017년 ‘하늘의 별’이 된 고 조동진에 대한 기억부터 다시 삶을 회복하고 음악을 잡기까지... 조동희의 ‘생’이 한국 대중 음악사에 획을 그은 ‘음악공동체(동아기획-하나음악-푸른 곰팡이, 올해 초부터 최소우주가 정신을 계승)식 품앗이’로 새 결실을 맺었다.
‘더클래식’의 박용준이 키보드를 맡고, ‘슬픔은 아름다움의 그림자’의 코러스엔 장필순이 소년합창단같은 화음을 중첩시켰다. 절반의 곡을 쓰고 전체를 프로듀싱한 조동익은 프로그래밍 외에 기타와 베이스까지 넘나들며 생동감 있는 리듬과 화성, 멜로디를 숨결처럼 불어넣었다.
“동진-동익 오빠는 늘 음악적 자존심과 인내와 인고의 시간을 맞바꾸지 않았어요. 세상과의 타협이 없었죠. 매사 꼼꼼한 음악 작업과 생활 태도는 제게 늘 귀감이 돼요.”
9년 만에 정규 2집 ‘슬픔은 아름다움의 그림자’ 낸 조동희. 사진/최소우주
동화 같은 이름의 이 스튜디오에서 길어 올린 음반은 앰비언트(환경음악)가 오로라처럼 휘감겨 있다. 신비하고 기묘한 에메랄빛이 겨울 밤을 수놓듯. 장필순 7집(2013), 조동진 유작(2016년), 장필순 8집(2018년)의 프로듀스, 믹스, 마스터링에 참여한 1980년대 전설적 듀오 ‘어떤날’의 일원인 조동익은 본작에서도 굽이치는 전자 사운드로 조동희가 설계한 성스러운 삶의 독백을 물 흐르듯 실어 나른다.
첫 곡(‘사슴꿈’)부터 ‘지직’거리는 노이즈의 파편들이 무의식 어디쯤의 문을 열고 ‘조동희 월드’로 초대한다. 실제 조동희가 꿈에서 본 사슴을 ‘사랑하고 싶은 대상’에 대입해 풀어낸 곡. 가상악기들이 펼쳐대는 입체적 소리 미학이 동화 속 막 튀어나온 요정들의 합주를 연상시킨다. 돌로 된 실로폰을 타격하는 아이슬란드 음악만큼이나 신비롭다.
‘슬픔은 아름다움의 그림자’ 앨범 커버. 실제 조동희는 조동익과 '무지개 스튜디오'에서 올라퍼 아르날즈 등 아이슬란드 음악가들의 음악을 들었다고 했다. 인터뷰 중 막 나온 앨범 커버를 본 뒤 기자가 "뷔욕 같이 나왔다" 하자 "정말 좋아한다"고 응수했다. 사진/최소우주
잠을 통해(‘사슴꿈’) 조동희 월드로 접속하면 과거의 향수와 오늘의 고민이 액자식 구성처럼 걸려 있다.
이어지는 타이틀곡(‘슬픔은 아름다움의 그림자’)은 앨범 전체를 엮는 주제가. 조동희는 오래 전 제목과 동명의 문장을 적어 놓고 되뇌다 2017년 조동진 장례식장에서 비슷한 말을 하는 고인의 생전 영상을 보고는 이를 음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1차 녹음 후 올해 기일(8월28일)엔 사진 앞에서 ‘초혼의식’처럼 틀었다.
곡 초반엔 “울고 있지만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조동진 1집 ‘행복한 사람’의 가사가 자꾸만 겹쳐 보인다. 후주엔 일렁이는 소리 증폭이 청량한 전자음악의 숲을 드리운다.
“앨범 전체에 깔린 슬픔이란,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것들이에요. 이별, 마음 아프고 서운한 감정들... ‘슬픔이란 아름다움으로부터 오는 것 같다’고 동진오빠는 얘기했었죠. 그런 감정들이 결국 나를 비춰주는 달빛이었다는 걸... 이젠 알아요. 이 곡은 오빠가 떠난 뒤 제가 적어 보내는 편지 같은 거예요.”
2집 전체를 ‘관조적 시각’이 관통한다. 슬픔과 아픔, 기쁨과 행복 같은 뜨겁고 차가운 순간적 정서들이 발화한 후의 느낌. 맑고 청아한 조동희의 높은 음색은 산책자 시각을 견지하며 비우고 정화하는 느낌을 준다.
앉았다 떠나는 새들을 바라보는 나무 입장에서 ‘오고가는 것들’을 생각하고(‘유선형의 그리움’), 어린 시절 친구이자 위로였던 라디오(‘라디오’)와 30원짜리 마분지로 만들던 종이 피아노(‘종이 피아노’)를 떠올리며... 유튜브로 익힌 조동희의 하모니카 연주(‘동쪽 여자’)는 마루바닥을 뒹굴대며 듣던 그의 오르골 추억도 환기시킨다. 일순간 70년대로 데려가는 조동진 1집의 오카리나 같다.
9년 만에 정규 2집 ‘슬픔은 아름다움의 그림자’ 낸 조동희. 사진/최소우주
앨범을 닫는 마지막 곡은 어떤날 2집의 ‘초생달(1989)’. 하나음악 시절에 바치는 이 ‘조동희 헌정가’는 생의 마디마다 자리한 슬픔들을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관조하며 맺는다. ‘뜻 모를 얘기와 버려진 하얀 달빛, 하얗게 타버린 또 하루를 위로 하며’(‘초생달’ 가사 내용 중) 슬픔은 때로 ‘눈물의 아름다운 희극’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조동희는 “3개월 간 애월과 서울을 오가며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마당의 감나무와 온갖 새들, 새순 만지고 자연의 느슨한 변화를 체감하며.
“아픔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제야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지금의 충만한 기분, 그 작은 행복들이 프랙탈처럼 큰 행복을 완성시켜 줄 것이란 것도요. 동화책을 읽다가 꿈 꾼 기분처럼 음반을 들어줬으면 해요.”
동화 같은 ‘조동희 월드’를 빠져 나오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앨범의 영감이 된 자신의 삶을 ‘어떤 것’이라 압축할 수 있다면 무엇일지.
“어렵다”며 골똘히 한참을 생각하던 그가 끝내 ‘노래’라고 답한다.
“심적으로 힘들 때도, 혼자서 버틸 때도 생각해보면 늘 노래를 하고 있었어요. 내 마음의 소리를 입밖으로 내며... 노래는 나를 삐뚤지 않게 해주는 ‘지지대’ 같은 거예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