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재즈 거장이 아니라 거지지, 재즈 거지."(류복성)
"나는 나팔쟁이니까 음악을 잘 할 때 사람이 되는구나..."(고 이동기)
수십명이 숨을 죽인 가운데, 한국 재즈계의 터전을 일군 이들의 모습이 커다란 스크린에 흘러나왔다.(2010년 재즈평론가 남무성의 음악 다큐 '브라보! 재즈 라이프' 한 장면)
홍덕표(트럼본), 최세진(드럼), 김대환(타악기), 조상국(드럼), 이동기(클라리넷), 박성연(보컬)…. 이제는 고인이 된 이들은 '재즈 불모지'라 불리는 한국에서 치열하게 싹을 틔워온 주역들이다.
연주 경력만 합쳐도 족히 수백년이 넘을 이 '지음(知音)'들이 영상 속 탁주 한 사발을 앞에 두고 걸걸한 담소와 연주를 오가자, 홀의 온도가 후끈 달아올랐다.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열린 '세계 재즈의 날' 전야 콘서트. 사진/Photo by Lee Dayoung
영상 전후, 무대에 오른 한국 1~3세대 '재즈인들'은 뒤섞이고 흩어지는 지류처럼 앙상블을 펼쳐댔다.
칙 코리아를 추모하는 '한오백년' 피아노 솔로는 돌주먹으로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건반을 팔꿈치로 때리고 손으로 미끄러뜨리다, 피아노 의자에서 떨어질 뻔한 한국 재즈 1세대 신관웅의 연주는 '왜 공연을 현장에서 봐야하는지' 절실히 깨닫게 했다.
한국의 대표적 재즈 디바로 꼽히는 웅산과 말로의 스캣(즉흥 보컬) 대결, 국악과 재즈가 뒤섞인 앙코르 난장은 훗날 한국 재즈사에 기록될 공연으로 남을지 모른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재즈의 날(매년 4월30일)'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야 콘서트.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는 사단법인 한국재즈협회(2009년 설립) 주도로, 한국의 재즈사를 엮은 이 공연이 첫 발을 뗐다.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열린 '세계 재즈의 날' 전야 콘서트. 웅산(가운데) 한국재즈협회장을 비롯해 한국 1~3세대 재즈뮤지션들이 나란히 서 있다. 사진/Photo by Lee Dayoung
3일 화상으로 만난 웅산 한국재즈협회장은 "(이번 공연이) 한국 재즈계의 진취적 행보를 위한 신호탄이길 바란다. 벌써부터 내년 스케줄을 불도저처럼 밀어 붙이고 있다"고 했다.
웅산은 올해 1월 한국재즈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신관웅(피아노), 이정식(색소폰)에 이은 협회 3대 회장이다.
"국내 재즈계의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응당 제가 해야하는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 했지만 시도 자체가 의미있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한국 재즈의 발전을 염원하시는 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체감했습니다."
이번 공연에선 신관웅, 최선배(트럼펫), 김준(보컬) 같은 1세대 선구자들이 강재훈(피아노), 서수진(드럼) 등 후배들과 어우러진 무대가 울림을 줬다. 웅산은 "한국 재즈의 맥을 보여주고 싶었다. 주름과 연륜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난관과 수고와 노력의 세월을 존중한다"고 했다.
"재즈는 비록 서양의 장르이지만, 오랜 세월 우리 고유의 한국적 정체성도 묻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님들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것은 꼭 해내야 할 중요한 일인 것이죠. 부모 없는 자식 없듯 저 역시 25년 전 처음 재즈를 공부할 때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국 재즈계를 대표하는 재즈보컬리스트이자 한국재즈협회장 웅산. 사진/유니버설뮤직코리아
지난해 국내 1세대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 타계 후, 그는 점점 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고 박성연은 국내 최초 토종 재즈 라이브 클럽 '야누스'를 설립해 평생 운영해온 한국 재즈계의 '산 역사'다. 대중 기호에 맞추는 음악적 타협을 하지 않아, 야누스는 긴 세월 재정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현재 후배 말로가 이어받아 꾸려가고 있다.
"'나는 힘들때마다 블루스를 더 잘 부르게 될 거야'라는 그 말이 아직도 선하고 울컥합니다."
웅산은 "재즈뮤지션들이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고 있는 사실이 속상하다. 어떻게든 지금보다 좋은 환경을 조성해 보도록 앞장 서겠다"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세계 재즈의 날'의 메인이벤트인 '글로벌 올스타 콘서트'를 국내에 여는 게 목표다. 해마다 올림픽처럼 개최 도시를 옮기는 재즈계 빅이벤트이나, 현재까지 한국에서는 열린 적이 없다. '세계 재즈의 날' 총감독 존 비슬리와 유치를 위해 소통 중이다.
"한국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재즈를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은 중요합니다. 김구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죠. 제가 목이 상할 정도로 판소리를 공부한 맥락도 비슷합니다. 서로 다른 장르의 융합이 만들어낼 시너지가 어떨지 제 스스로 증명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는 실제로 3~4년 전부터 국악을 연마했다. 이번 공연에서도 국악인 장재효(장구)와 ‘좌우나졸’(수궁가) 무대를 꾸몄다. 재즈와 충돌하는 자진모리 장단은 관객들의 몸을 절로 일으켜세웠다.
"재즈는 늘 경계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쪽으로도 건너갈 듯, 계속해서 흐르는 것이죠. 아주 자연스러워야 되고, 아주 자유스러워야 하는 것, 화합해야하는 것 또한 재즈입니다."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열린 '세계 재즈의 날' 전야 콘서트. 사진/Photo by Lee Dayoung
'세계 재즈의 날'을 "단지 재즈 뿐이 아닌 모두의 잔칫날로 만드는 것"이 웅산이 그리는 최종 목표다. '글로벌 올스타 콘서트'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재즈를 위한 정부 차원의 도움은 지금까지 '제로(0)'에 가깝다고 알고 있습니다. 국내의 훌륭한 보석들을 세계에 자랑하려면 정부와 기업 차원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향후 '세계 재즈의 날'을 노들섬에서 열고 싶다고도 했다.
"버려졌던 곳인데, 다시 새롭게 태어난 곳이잖아요. 강북과 강남을 이어주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누군가로부터 소외받고 외면받아온 재즈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재즈는 늙지 않고 늘 살아숨쉬며 소통하는 음악이죠."
"내년 노들섬에서 열린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아주 기묘하게 맞아 떨어질 것 같지 않나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