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김현철 “32년 전, 그게 제 음악적 DNA였어요”

정규 11집 ‘City Breeze & Love Song’
데뷔 이래 발라드 한 곡 없는 앨범 처음
“시티팝이란 단일 장르로 규정되기 원치 않아”

입력 : 2021-06-30 오후 3:41:36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가수 김현철. 사진/Fe&Me
 
2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한 삼계탕 집. 반듯한 정장 차림에 동그란 안경테를 쓴 이가 환한 미소로 기자를 맞았다.
 
김현철. 시티팝 재조명 붐을 타고 13년 공백(2019년 10집 ‘돛’ 발매)을 탈출한 그는 최근 2년 만에 11집 ‘City Breeze & Love Song’을 내놨다.
 
발라드 한 곡 없는 앨범은 데뷔 30여년 만에 처음이다. ‘오랜만에’, ‘동네’, ‘왜 그래’ 같은 초기작들에서 느껴지던 시원한 풍랑이 스피커를 타고 앨범 전체에서 불어온다.
 
‘나의 머리결에 스쳐가는/이 바람이 좋은걸/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분/밤은 벌써 이 도시에~‘ 대뜸 ‘오랜만에’ 가사를 읊조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1집(‘김현철 Vol.1’ 1989년 발매)은 사실 시티팝이란 용어조차 없을 때 나왔거든요. 그런데 도시, 바람, 향기 그런 개념이 다 나와요. 어떻게 보면 그게 제 음악적 DNA였던 거예요.”
 
김현철 11집 'City Breeze & Love Song' 앨범 커버. 사진/Fe&Me
 
이날 그와 마주앉아 뽀얀 닭 육수를 들이키니 잿빛 도시가 파스텔톤으로 일렁였다. 그의 언어는 시원한 음악의 미풍과 닮아 있었다. 데이비드 호크니 그림처럼 ‘풍덩’ 뛰어들 듯. 여름날 정경이 눈앞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살면 살수록 도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좋아져요. 그 바람은 바람 이상의 것을 담고 있을 거예요.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상대에 대한 느낌일 수도 있고,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의 전해짐일 수도 있겠죠.”
 
앨범과 동명의 첫 곡부터 여름날 도시 풍경이 그려진다. 김현철이 직접 주무르는 키보드 선율 위로 세련된 악기들의 연주와 편곡이 겹을 이룬다. 서걱대는 하이햇 박자, 분주히 음계를 오가는 일렉기타의 펑키한 소리, 부드럽고 미끈한 관악(색소폰·트럼펫·트롬본)과 후반 폭발하는 색소폰 솔로... 
 
크레이그 런키, 짐 슈미트, 브루스 히바드, 닐슨 앤드 피어슨 같은 1970, 80년대 미국 AOR(앨범-오리엔티드 록)을 즐겨 들으며 그는 자신의 음악적 DNA를 탐험해 들어갔다.
 
32년 전 ‘스무살 천재’로 등장한 그의 환영을 앨범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다. 미디엄템포와 펑키 리듬, 청량한 관악 섹션이 과거와 오늘날의 김현철을 잇는다. 2번곡 ‘So Nice!!’에는 ‘오랜만에’의 기타 솔로 일부도 그대로 재현해 넣었다.
 
“‘야, 이거 시티팝이네’ 하는 말에 대한 거부감은 음악가로선 당연할 수밖에 없죠. 제 음악을 시티팝이란 장르로만 규정하는 것은 시나위를 하드록 앨범으로 분류해버리는 것과 같아요.”
 
가수 김현철. 사진/Fe&Me
 
실제로 ‘돛’ 음반을 내기 전까지 시티팝이 ‘사탕 이름인줄 알았다’던 그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재유행한 시티팝은 30년 만에 그의 음악을 재차 조명 위에 올려놨지만 그는 “김현철은 김현철의 음악을 할 뿐”이라 했다.
 
“음악가들은 특정 장르에 갇히기보단, 장르를 파괴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거든요.”
 
신보는 도심에 근무하는 사회 초년생 정도를 화자로 설정했으나 딱히 규정한 건 아니다. 화자가 혼잡한 도시에서 만나는 상대, ‘너’에 대한 해석 역시 청자 해석의 자유다. 연인일 수도, 사랑하는 대상이나 물건일 수도, 혹은 자신이 염원하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
 
대상에 대한 설레는 마음에 ‘흑백은 컬러가 되고’(2번 곡 ‘So Nice!!’), 마음은 ‘열기구처럼 떠오른다’(6번 곡 ‘Take Off’). 김현철은 “젊을 때 느끼는 초창기 사랑의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대상에 대한 갈망과 애정은 일상, 우정까지 이르며 점차 거대 주제로 번져 간다. 4번 곡 ‘평범함의 위대함’에는 소시민의 미학, 7번 곡 ‘동창’에는 학창시절을 통해 비춰본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지금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가면 중 제일 큰 것은 재산이나 지위겠죠. 그런데 그런 것들을 우선시하며 살면 뭐가 좋은지... 결국 중요하고 필요한 건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아니겠어요? 사람 간 관계는 내가 최선을 다한다 해도 50% 밖에 안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신보는 사랑과 사람의 힘으로 엮은 공동체적 작업물이다. 전작 ‘돛’에 이어 국내 최고 수준 기량의 연주자들이 합세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베이시스트 이태윤, ‘이승환 밴드’ 기타리스트 조삼희, 이적의 프로젝트 밴드 긱스 출신이자 한국 재즈계의 독보적인 드러머 이상민을 비롯해 권병호(하모니카), 장효석(색소폰), 박준규(트럼펫), 최재문(트럼본)이 참여했다.
 
“우리는 무엇보다 서로를 좋아해요, 서로를 좋아하면 알게 모르게 힘이 생겨나요. 못할 것 같은 일들도 ‘그래 힘내보자’ 하며 헤쳐갈 수 있죠. 관계의 힘은 이런 거예요.”
 
“음악이 지겨워져서 떠났다”는 그에게 노트북을 덮으며 물었다. “다시 떠나진 않으시겠죠?”
 
삼계탕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낸 그가 초탈자 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인생은 늘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죠. 그때도 재미없어 질 줄 알았나요, 뭘. 그래도 다시 잡은 음악, 지금까지는 정말 재밌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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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