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마포구 마포역 3번 출구, 짧은 바늘이 숫자 9를 가리켰을 때쯤. 차들이 지나는 넓은 도로 맞은 편을 한 남자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높은 건물이 서있었다. 1층에는 화려한 간판을 자랑하는 상가들이 늘어섰다. 그 위로는 곳곳에 불이 켜진 아파트가 반듯한 외양을 뽐내며,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쭉 뻗었다. 누가 봐도 으리으리하다고 생각할 법했다.
“저런 데에 살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옆에서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린 다른 남자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사지 않을까?”
둘은 이내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지하로 떨어져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그들이 궁금해했던 그 아파트는 전용면적 58㎡ 매물이 이달 1일 기준으로 최저 8억8000만원에 나왔다. 85㎡ 매물은 14억원을 자랑하며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아파트 매물은 ‘그림의 떡’이 됐다. 수급 불균형의 악화로 집값이 꾸준히 오른 결과다. KB국민은행 리브부동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 서울 내 소형(전용 60㎡ 이하)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8억2668만원을 기록했다. 중소형(전용 60㎡ 초과 85㎡ 이하) 면적대는 평균 10억4201만원이다. 중형(85㎡~102㎡)은 13억1974만원이고 중대형(102㎡~135㎡)은 15억5394만원으로 대출금지선을 넘었다. 대형(전용 135㎡ 초과)은 아예 20억원을 넘어버렸다.
실수요자들이 청약 시장에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한 결과다. 매매가격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상황이다. 신규 공급단지는 정부 규제 덕에 시세보다 저렴한 분양가로 물량이 풀린다. 신축이라는 이점도 있다. 대한민국 국민 중 약 5분의 1이 몰려 사는 서울에서 청약통장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이 때문에 서울의 분양 단지가 평균 수백대 1의 경쟁률을 올리는 건 필연이다.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서울에서 풀린 일반분양은 1666가구다. 총 청약자는 27만2307명이다. 평균 경쟁률은 163대 1에 육박한다.
청약 경쟁이 치열해지면 당첨가점이 높아진다. 가점 경쟁력이 있다면 다음 청약을 노리면 되지만, 가점이 낮은 이들에게는 청약 당첨도 그저 남의 일이다. 이들은 다시 매매시장으로 눈을 돌린다. 청약시장에는 가점과 돈 둘 다 필요하지만, 매매시장에서는 더 많은 돈만 있으면 된다. 지난해 여름 이후 서울 아파트 시장을 달구고 있는 패닉바잉(공황구매)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매매와 분양시장은 서로 연결돼 있어요. 젊은 세대가 주로 가점이 낮은데, 청약에서 떨어지면서 매매시장으로 들어오고 그러면서 매물량이 줄어들죠. 공급 순환이 원활히 된다면 모르겠지만 신규공급도 막혀있고 재고주택도 돌지 않으니 집값이 다시 올라요. 여기서 또 가격에 좌절하는 분들은 청약 시장에 결국 눈을 돌리죠. 악순환이에요.” 한 전문가는 덤덤하고 간결한 말투로 설명했다.
이런 악순환을 끊으려면 변화가 필요하다. 신규 공급의 효과가 당장 기대하기 힘들다면, 단기매물을 늘리는 게 그나마 손쉬운 방안이 될 수 있다. 단기매물 출현을 꾀할 방법으로는 양도세 완화가 주로 꼽힌다. 양도세를 낮춰 다주택자 매물에 퇴로를 만들어주자는 게 요지다.
당국은 투기세력이 시세차익을 누리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그러는 사이 실수요자의 좌절은 계속 커지기만 했다. 지금은 편익비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투기세력 잡자고 실수요자까지 괴롭힐 여유는 이제는 없다.
김응열 기자 sealjjan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