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준강간·준강제추행죄에서의 '항거불능' 개념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준강간·준강제추행죄는 술이나 약에 취한 상태를 이용해 피해자를 상대로 성폭력범죄를 저지르는 범죄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A씨가 형법 299조에 명시되 '항거불능'의 개념이 모호하고 판단기준이 불명확해 헌법상 죄형법정주의 위반이라며 낸 헌법소원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고 9일 밝혔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형법 299조는 이미 존재하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해 간음 또는 추행을 한 경우를 폭행 또는 협박으로 강간 또는 추행을 한 경우와 동일하게 처벌하는 규정으로, 이는 정신적 또는 신체적 사정으로 인해 성적인 침해에 대해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순종하지 않고 맞서서 대항할 능력이 없는 상태'라는 '항거불능'의 사전적 의미와 형법 299조의 목적을 함께 고려하면, 심판대상조항이 정한 ‘항거불능’의 상태란 가해자가 성적인 침해행위를 함에 있어 별다른 유형력의 행사가 불필요할 정도로 피해자의 판단능력과 대응·조절능력이 결여된 상태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또 "‘항거불능’의 상태는 형법 299조의 문언상 ‘심신상실’에 준해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신장애 또는 의식장애 때문에 성적행위에 관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심신상실 상태와 동등하게 평가가 가능한 정도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런 사정들을 종합하면, 건전한 상식과 통상적인 법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형법 299조의 ‘항거불능’의 상태가 무엇인지 예측하기 곤란하다고 보기 어렵고, 이를 법 집행기관의 자의적 해석이나 적용가능성이 있는 불명확한 개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며 "결국 심판대상조항은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A씨는 형법 299조가 술을 마신 상태에서 상호 합의하에 성관계가 이루어진 사안에서도 수사와 재판절차 중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가 인정돼 준강간죄가 성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조항이 술을 마신 상대방과 성관계를 맺을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심판대상 조항은 정신적·신체적 사정으로 인해 성적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원치 않는 성적 관계를 거부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상호 합의 하에 성관계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A씨의 주장을 배척했다.
A씨는 2015년 7월 피해 여성의 술에 취한 상태를 이용해 2차례 추행하고, 술에 취해 잠든 피해자를 1차례 간음한 혐의(준강제추행죄 및 준강간죄)로 기소됐다.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A씨는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으나 모두 기각됐고, 상고심 진행 중 심판대상 조항이 헌법 위반이라며 재판부에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으나 기각되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헌법재판소 청사. 사진/헌재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