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티벌이 돌아왔다. 내한공연도 하나 둘 씩 돌아온다. 공연이 일상이던 시절을 2년간 잃어버린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라인업을 확인하고 은행 잔고를 챙길 것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 옷장을 열어 수북히 쌓인 밴드티셔츠를 확인하는 것이다.
90년대부터 코로나19시대 이전까지, 수많은 공연을 다녔다. SNS가 없던 시절, 스스로에게 하는 관람 인증은 티셔츠를 사는 것이었다. 밴드티를 제외하고는 여름옷을 산 적이 없다. 내한공연이나 페스티벌에서 파는 투어 한정 머천다이즈(MD)를 음반처럼 사 모았다. 그러다 보니 밴드티가 여름 유니폼이 됐다. 사진을 찍거나 공식적인 자리에 가면 어떤 밴드티를 꺼내 입을지 고민하는 게 일이다. 국내외를 다니며 사모으고,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서도 구매하다보니 나름 밴드티에 대한 이론이 생겼다. 보통 옷을 살 때는 디자인과 소재, 핏 등을 고려하지만 밴드티는 그런 원칙이 통하지 않는다. 프린트 디자인과 프린트 디자인, 그리고 프린트 디자인, 그게 전부다. 몇 가지 전제 조건은 있다. 미국 밴드의 경우 평소 입는 사이즈보다 한 사이즈가량 줄여서, 영국과 일본은 평소 사이즈에 맞춰 사면 된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그 다음은 색상인데, 밴드티의 90% 이상이 검은색으로 제작된다. 블랙 말고 다른 색상 옵션이 있다면 다행인데, 메탈이나 하드코어 등 '빡센' 장르는 닥치고 블랙만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 보니 나의 밴드티 역시 블랙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데, 진작 이런 티셔츠에 질리다 보니 이제는 웬만큼 좋아하는 밴드가 아니고서는 밴드티를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 아닌 장점이 생겼다.
그러나 세월은 변할지언정, 지갑을 노리는 산업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 법. 음반산업이 쇠퇴하고 음원산업의 규모가 음반의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지 않는 이 시대에 공연은 음악산업의 헤게모니를 차지한다. 그에 따른 부가가치, 즉 티셔츠를 비롯한 머천다이즈의 중요성도 커졌다. 예전처럼 블랙과 화이트만으로는 시장의 요구를 채울 수 없다. 이에 최근 몇 년 사이 밴드티의 컬러는 놀랍도록 다양해졌고, 나의 행어에는 마치 드림콘서트의 아이돌 팬클럽 풍선 색만큼이나 다양한 색깔의 티셔츠가 걸리게 됐다.
그렇다면 어떤 밴드티를 살 것인가? 고려할 점 하나. 제조국이다. 중국이 거의 모든 밴드티를 제작한 시절이 있었다. 중국 인건비도 올라가다보니, 지금은 실로 다양한 나라에서 밴드티를 만든다. 주된 제조국은 중국, 필리핀, 온두라스다. 가끔 캄보디아산이 걸릴 때도 있는데 열외로 해도 좋을 만큼 형편없는 품질을 자랑한다. 거르자. 중국산과 필리핀산이 양호하고 온두라스산은 복불복이다. 혼방인 경우 몇 번만 빨아도 보푸라기가 일기 일쑤고, 이른 목 늘어남을 막기 위해 입고 벗을 때 꽤나 긴장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산과 필리핀산은 대부분 '평타'는 친다. 이건 어디서도 안 알려주는 정보다. 오직 내 경험의 소산이다.
많은 밴드티 중에서도 으뜸은 해외 페스티벌 오피셜 티셔츠다. 글래스턴베리, 코첼라, 서머소닉 같은 해외 페스티벌 티는 '록부심'을 한껏 부릴 수 있는 아이템이다.
슬프게는 휴가 때 군복과도 같은 존재다. 아무리 밤새워 전투화에 물광을 내고 전투복에 빳빳이 줄을 세워도 서울역에서 마주치는 다른 부대 군인들이나 관심을 보일 뿐, 민간인이 보기엔 다 똑같은 군복 아닌가. 그러니 밴드티를 뽐낼 수 있는 건 같은 덕후들끼리 모일 때다. 나의 경우, D일보의 임모 기자와 만날 때 유독 티셔츠 선정에 신경을 쓴다. 해외 출장이 잦았던 그는 놀랄 만큼 희귀한 티셔츠를 뽐내며 등장한다.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서는 U2의 360스테이지 투어 티셔츠라던가, 글래스톤베리 2009 티셔츠 같은 걸 입고 가야한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승부인 것이다. 록의 '승부근성'이 힙합과 케이팝으로 넘어간지 오래지만, 아직 어딘가에는 티셔츠로 덕력과 근성을 발휘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올 여름 페스티벌의 MD담당자들은 부디 알아주었으면 한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noisep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