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응열 기자] 대법원이 명예훼손죄를 폭넓게 인정한 하급심 판결을 잇달아 파기하면서 하급심 법원에 제동을 걸었다. 표현의 자유와 건전한 여론 형성 등을 지나치게 제한할 우려가 있다는 취지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일부 유죄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에 되돌려 보냈다고 19일 밝혔다.
지난 2017년 11월 A씨는 고양시 소재의 한 병원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전단지를 배포했다. 전단지에는 A씨 모친의 수술을 담당한 의사 B씨가 유족과의 면담 과정에서 ‘재수가 없어 죽었다’는 막말을 한다며 B씨의 잘못된 만행을 알리고자 한다는 문구와 수술경과 모습을 찍은 사진이 담겼다.
A씨의 모친은 고양시 소재의 한 병원에서 B씨에게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는데, B씨는 본인을 찾아온 유족들에게 “댁의 어머니는 노령이고 질병이 있어 재수가 없고 운도 없다”며 “재수가 없으면 다 죽는다”고 말했다. 유족들이 이에 다시 항의했지만 B씨나 병원 측의 사과는 없었다. 이에 A씨가 전단지를 만들어 뿌린 것이다.
앞선 1심은 A씨가 허위사실로 B씨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보고 유죄로 인정해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2심은 의사 B씨의 발언을 허위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은 무죄,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유죄로 보고 원심을 깬 뒤 벌금을 50만원으로 줄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무죄 취지로 하급심 판결을 뒤집었다. A씨가 뿌린 전단지는 공익성이 인정되기 때문에 명예훼손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전단지 내용은 환자가 사망한 의료사고 발생과 담당 의료인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인한 의료소비자의 피해사례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환자에 대한 의료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된 영역에서 의료인 자질과 태도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의료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로 공적인 관심과 이익에 관한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또 “A씨 행위의 주요 목적에는 의료 소비자들에게 B씨의 자질·태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 있었다”며 “B씨에 대한 원망이나 억울함 등 개인적인 목적이나 동기가 내포돼 있었다 해도 명예훼손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형법 310조의 적용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경기 수원시에서도 한 부부가 명예훼손 등 혐의로 기소돼 하급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이 원심을 깬 사례가 나왔다.
수원시의 한 빌라를 소유하던 장인·장모를 대신해 관리하던 이들 부부는 빌라에 거주하던 C씨에게서 누수가 발생하고 있다며 공사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C씨와의 전화통화에서, 빌라에 거주하던 임차인 D씨 가족이 협조하지 않고 있다며 공사가 늦어지는 책임을 D씨 가족에게 돌렸다.
당시 이들 부부는 C씨와 통화 중 “모든 문제는 세입자”라며 D씨 가족이 ‘자기한테 돈 얼마 달라’, ‘얼마 줄 수 있느냐’, ‘최소한 500에서 1000만원은 자기한테 떨어져야지 이거 수리해주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D씨 가족은 이들 부부에게 돈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도 이 같은 허위사실을 C씨에게 전한 것이다. 이들 부부 중 아내는 C씨와의 통화에서 D씨 가족을 모욕한 혐의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이들 부부의 혐의를 모두 유죄로 봐 남편에게는 벌금 200만원을, 아내에게는 벌금 300만원을 각각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이들 부부가 C씨와 통화 중 말한 내용은 C씨를 통해 불특정 다수인에게 전파 가능성이 있었다고 봄이 타당해 공연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들 부부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2심은 1심 판결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을 깨고 사건을 수원지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의 각 발언은 빌라의 누수 공사가 피해자들의 협조 문제로 지연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며 “발언들이 피해자들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높다거나 실제 전달됐다는 사정만으로는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카카오톡 채팅방 등 온라인상에서 이뤄진 명예훼손 범죄에 관해서도 무죄 취지로 원심을 파기했다.
E씨는 지난 2019년 1월 고등학교 동창 10여명이 참여한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F가 내 돈을 갚지 못해 사기죄로 감방에서 몇 개월 살다 나왔다. 집에서도 포기한 애다. 너희들도 조심해라’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E씨는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E씨에게 벌금 50만원을 선고하되 선고를 유예했다. 이에 E씨가 항소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달리 판단했다. 대법원은 “E씨가 글을 채팅방에 올린 것은 F씨로 인해 고교 동창 2명이 재산적 피해를 입은 사실에 기초해, F씨와 교류 중인 다른 동창생들에게 주의를 당부하려는 목적이 포함돼 있다”며 “E씨의 주요 동기와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이 원심을 깨면서 사건은 대구지법으로 넘어갔다.
대법원 관계자는 “명예훼손죄를 폭넓게 인정하는 경우 타인에 대한 공정한 비판마저 처벌해 건전한 여론 형성이나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을 위험이 있다”며 “위법성조각사유로서 공공의 이익이 문제될 경우 표현의 자유를 보다 넓게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판결의 의의를 설명했다.
서울시 서초구 대법원. (사진=대법원)
김응열 기자 sealjjan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