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눈을 감으면 청년 김종진, 전태관이 스튜디오에 있었습니다. 19살로 회귀한 정재일 군('기생충', '오징어게임'의 음악감독)이 콘트라베이스를 주무르고 있었고요…"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CJ아지트 광흥창에서 열린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고 전태관)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 20주년 기념 LP 발매 기자간담회. 김종진은 오리지널 릴 마스터 테이프로 재작업한 20주년 기념 LP반(10월1일 2000정 한정 발매)에 대해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타임머신을 탄 것 같았습니다. 당시 함께 한 연주자들이 스튜디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듯. 이번 LP는 아날로그의 추앙물입니다. 시간 뛰어넘는 가치가 어떻게 살아남는가, 그 증명입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고 김현식(1958~1990)의 대표 앨범이자 대표곡으로 시작한 밴드의 상징성은 반세기 가깝게 퓨전재즈, 블루스, 록으로 변주되며 한국 대중음악사에 깊은 뿌리를 내려왔다.
이번 LP는 이들의 대표작인, 7집('Bravo My Life!'·2002) 녹음 당시 스튜디오의 공기까지 구현했다는 점에서, 기존 리마스터링 개념식 음반과는 접근 자체가 다르다.
지난해 연말부터 오리지널 릴 마스터 테이프를 기반으로 미국에서 마스터링, 래커 커팅(래커 판에 마스터 음원을 소리골로 새기는 작업), 스탬퍼(LP 생산을 위한 원판) 작업이 이뤄졌다. 세계적인 마스터링의 거장 버니 그런드만이 지휘했다.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프린스의 'Purple Rain' 등을 포함해 지미 헨드릭스, 도어스, 핑크 플로이드, 카펜터스 등 지난 60년 간 걸작 앨범의 마스터링과 래커 커팅을 맡아온 장인이다. 버니는 산울림 전집의 릴 마스터 테이프 기반 LP의 래커 커팅과 스탬퍼도 맡았다.
김종진은 본보 기자와의 대화에서 "버니 그런드만이 작업한 카펜터스 음반을 들어보면, 릴 마스터 테이프 기반의 LP 음질이 얼마나 다른지 와 닿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음악이 상업적인 산업을 돌아가게 하는 기능으로 전락한 측면이 있지 않나요. 릴 마스터 테이프들을 풀어가면서 20년 전 순수의 시대, 음악 본위의 시대가 생각났습니다. 투지가 불타올랐어요."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CJ아지트 광흥창에서 열린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고 전태관)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 20주년 기념 LP 발매 기자간담회.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1940년대 영국의 간행물 'Make Do And Mend'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세계 2차 대전으로 피폐한 영국 정부가 간행한 잡지거든요. 해진 옷을 아름답게 꿰매서 입는 것도 가치있다는 이야기들이죠. 빨리 사라지고, 사라지는 것은 쓰레기로 남고, 그래서 버려지는 것이 남겨진 것보다 많은 이 시대에 새로운 문화를 제시해보고 싶었습니다. 지속가능성, 컨티뉴어티의 수호자로서."
음악 애호가들이 즐길 만한 셋트 구성 또한 돋보인다. 음반 표지 색깔은 비틀스의 일명 '화이트 음반'처럼 백색이다. 여기에 투명 플라스틱 띠지로 2002년 음반 표지에 있던 김종진과 고 전태관의 걷는 모습을 새겼다. "(2002년 음반 작업 당시) 우리의 퓨전 음악 가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동서양 문명이 섞여 있는 헝가리의 허물어진 성 같은 곳을 가고 싶다는 제 바람에 김중만 씨, 그리고 태관이 동행해 (음반 표지의 걷는) 그림이 나오게 됐죠. 어떤 이는 느긋하게, 어떤 이는 뒤도 안돌아보고 가는 이 사진으로, 이번에는 시간초월자의 느낌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수록곡 중에는 '웃으며 헤어지던 날'이 의미심장했다고. "제가 클래식과 일렉트릭기타 쳤고, 재일 군이 콘트라베이스를 맡았죠. 안타깝게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곡만 태관이 참여하지 않았어요. 차분하게 연주되는 세 악기에 귀를 맡기며, 음악가의 삶에는 예지력이 있나 싶었습니다."
이번 LP를 시작으로 'Make Do And Mend' 운동을 전개할 예정. 김수철, 김현식, 이장희, 송창식 같은 선배 음악가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형들은요. 항상 음악에서 얻어지는 감흥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러면 반드시 보답이 온다고... 가사는 탕진을 해도 된다. 그 생각을 아직도 갖고 있어요. 형들과 멋진 연주 앨범 한 번 내보고 싶어요."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고 전태관)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 20주년 기념 LP. 사진=봄여름가을겨울엔터테인먼트
오는 15일 같은 장소에서 '만원사례' 타이틀의 공연을 연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 전곡 만 한 시간 동안 라이브로 선보일 계획이다. 다른 음반 앵콜 요청은 자제를 부탁했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어떤이의 꿈' 같은 곡 요청은 받지 않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20주년의 의미를 온전히 나누기 위해서요."
마지막으로 "죽는 순간까지 음악을 하고 싶다"는 그는 헤르만 헤세의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모든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주는데 있다. 그것은 예술가에게 더 없는 위안이 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20년 전 IMF로 힘들었던 국민들에게 기운을 주는 음악이었죠. 코로나로 기운을 잃은 지금 한국에도 '힘을 내자'는 얘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