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범(한국범)이 러시아 시호테알린 산맥 산악지형을 거닐고 있다.
지난달 설 연휴 마지막 날 안타까운 뉴스가 있었습니다. 서울대공원에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던 암컷 아무르 호랑이(한국범, 동베이호, Amur Tiger) 미호가 사육사 부주의로 다른 아무르 호랑이 금강과 다투다가 13년 생을 마감했습니다. 러시아에서 기증받은 호랑이의 후손으로 동물원에서 태어났고, 비교적 온순해 동물원을 찾은 탐방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동물친구였다고 합니다. 반면에 이웃 중국에서는 지난 1월 백두산 인근 호랑이 보호구에서 새끼와 함께 산악도로를 활보하는 5마리 호랑이가 감시 카메라에 포착돼 전 세계 뉴스매체와 SNS의 화제가 됐습니다.
러시아 극동지방과 중국 헤이륭장성과 지린성, 북한의 백두산과 개마고원 일대에 서식하는 야생 아무르호랑이는 2025년 기준 820여 마리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의 개발화가 진행되면서 400마리 미만으로 줄어들다가 최근 들어 러시아와 중국이 국가 차원의 보호정책을 펴면서 매년 꾸준히 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1943년 이후 공식적으로 확인된 개체수가 단 1마리도 없답니다. 1910~1930년대의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사람을 맹수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총독부는 포수들을 시켜 호랑이를 무차별로 포획했습니다. 일본은 예로부터 호랑이가 없는 까닭에 조선총독부의 고위관리들이 일본 황실에 호랑이 가죽을 상납하는 것은 출세길이 보장됐다고 합니다.
옛 문헌, 전설이나 민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호랑이는 맹수라기보다 의리 있고 정감 있는 이웃이었습니다. 깊은 산골 동네면 어디든 '범바위', '범골', '범고개' 등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과 전설이 남아있지요. 구한말에 서울시내 한복판에 있는 러시아공사관 주변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마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 것이 궁해서 인가로 내려왔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조선시대는 '호환(虎患)'이라 불리는 국가적 재난도 종종 있었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호랑이는 잡귀를 쫓는 영물로 여겨져 '호작도' 등 민화의 단골 소재가 됐으며 산을 지키는 '산신'으로 숭배됐습니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 속에도 호랑이가 등장하며, 1993년 부여에서 발굴괸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 부분에도 호랑이가 묘사돼 있습니다.
호랑이의 정확한 우리말은 범입니다. 하지만 일제가 범과 늑대 같은 맹수 구제를 하면서 총칭으로 부르던 호(범 虎), 랑(늑대 狼)이가 굳어져 범이 호랑이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옛 이름에 범골, 범바위는 있어도 '호랑이골', '호랑이바위'는 존재하지 않지요. 북한에서는 지금도 '조선범'이라고 부른답니다.
조선범(아무르호랑이)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양이과 동물로 동북아시아에 분포하며 벵갈호랑이나 수마트라호랑이, 인도차이나호랑이보다 덩치가 크고 이마에 임금 왕(王)자 무늬가 뚜렷하며 용맹합니다. 수컷은 몸무게가 270㎏까지 나갑니다. 호랑이는 크게 9개의 아종으로 분류하는데 발리호랑이, 키스피호랑이, 자바호랑이는 이미 멸종했고 남은 6종도 모두 멸종위기랍니다.
아무르범(한국범)이 달려드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
고양이과 동물들은 주로 뒤에서 목덜미를 습격하는 사냥습성을 가졌고, 실제로는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산림의 왕자로 통하는 호랑이지만 여러 사람들을 보면 도망칩니다. 30여년 전 필자는 야생 상태의 호랑이를 취재하기 위해 한 달 넘게 러시아 연해주의 시호테 알린 산맥 일대를 샅샅이 돌아다녔지요. 야행성이라 낮에는 활동이 뜸해 먹이로 유인하고, 나무 위 위장막 안에서 겨우 활영했답니다. 운 좋게 어슬렁거리는 2년생 정도의 어린 호랑이를 먼 발치에서 목격했는데, 사람들을 보자마자 도망쳤어요.
우리나라에서도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호랑이나 표범으로 보이는 고양이과 동물의 커다란 발자국들이 종종 목격된다는 보도가 이따금 나오고 있지만 그 신빙성에 의문이 갑니다.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가 생존해 있으려면 그들의 먹이인 대륙사슴, 노루, 고라니,산토끼 등이 풍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러시아나 백두산 일대에 떼지어 사는 대륙사슴도 남한에서는 멸종된 지 오랩니다. 그리고 하루의 행동 반경이 40~70㎢에 이른다는 호랑이들이 전국의 산 구석구석을 누비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지도 80년이 넘었습니다. 온 국민의 노력으로 헐벗은 민둥산이 울창한 산림으로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호랑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일은 없겠지요. 오히려 생태계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가 없으니까 천적이 사라진 멧돼지, 고라니 같은 동물이 엄청 늘어나고 있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야생 호랑이를 다시 만나려면 그들이 살 수 있는 먹이 조건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삼림의 이동로가 연결돼야 합니다. DMZ 휴전선의 철책이 사라지는 순간, 백두대간을 따라 호랑이들이 러시아와 중국에서부터 남북한까지 자유스럽게 오갈 수 있도록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이어지는 자연보존이 우선입니다. 지금과 같이 무분별한 개발이 계속된다면 우리 자손들은 동물원 우리 속에 갇힌 나약한 호랑이들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글·사진= 김연수 생태칼럼리스트 wildik0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