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관능적으로 두 팔을 치켜 들어올리던 첫 모습은 흡사 화보와 CF를 찢고 나온 모델. 마이크를 거머쥘 땐 영락없이 요즘 그 '힙하다'는 팝스타의 전형.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 KSPO 돔(구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코난 그레이(25)의 첫 단독 내한 공연은 'Z세대의 음악이란 이런 것'을 보여주는 증명의 현장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레이가 그레이를 만난 건지. 따스한 기온에도 회색 구름으로 뒤덮이던 이 날, 한국 팬들과 만난 그레이는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1998년 아일랜드와 일본계이자 미국 국적의 유튜버 출신 싱어송라이터.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 KSPO 돔(구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코난 그레이(25)의 첫 단독 내한 공연.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10대 시절, 유튜브에 브이로그와 데모곡들을 올리며 싱어송라이터 활동에 나섰습니다. 2017년 리퍼블릭 레코드(Republic Records)와 메이저 계약을 체결했고, 2018년 첫 EP 'Sunset Season'로 본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2020년 발표한 싱글 ‘Maniac'은 미국, 캐나다, 호주, 아일랜드 등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노래 덕분에 국내 음원 차트에서도 Z세대들 중심으로 인지도가 높은 가수입니다. 방탄소년단(BTS) 뷔가 영감을 받는다고 한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지난해 8월 ‘하우스 오브 원더’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올라 첫 내한 무대를 선보였는데, 당시 국내 패션 화보와 TV 음악방송에서 ‘손가락 하트’, ‘볼 하트’를 선보이며 국내 팬들과 소통 접점을 넓혀왔습니다.
이날 공연은 지난해 낸 정규 2집 'Superache'의 월드 투어 일환. 일본 오사카에서 시작해 아시아 투어 마지막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그를 보려 구름 떼 같은 수천명의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특히 10대·20대 여성 비율이 압도적이었는데, 1만석이 넘는 넓은 공연장을 거의 채울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 KSPO 돔(구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코난 그레이(25)의 첫 단독 내한 공연.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해리 스타일스 'Kiwi', 위켄드 'Blinding Lights', 더1975의 'UGH!'... 공연 시작 전부터 깔리던 입장곡들은 세계 대중음악시장에서 최근 솟아오르는, 전자음악이나 디스코 비트를 밴드 사운드와 황금 비율로 섞어 만든 음악들. 최근 이러한 사운드로 나아가고 있는 그레이의 곡과 무대를 암시하는 듯했습니다.
8시 정각이 조금 지나자 무대 위 커다란 장미 영상과 천 사이로 등장한 그레이. 맨몸에 검보랏빛 소재 반짝이는 조끼와 나팔바지 차림으로 텐션감 있는 비트의 첫 곡 'Disaster'를 쏘아올리면서부터 객석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가사 첫 줄부터 줄줄 따라하는 한국 특유의 떼창 문화에 오히려 압도 당한듯 시종일관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직접 기타를 메고 연주에 나선 'Wish You Were Sober'까지 4곡을 연속해서 열창 후 그는 “땡큐 코리아! 여러분은 진짜 목소리 큰 가수들이네요!”라고 외쳤습니다.
'Superache' 투어 일환인 만큼 이 앨범 수록곡들을 라이브로 실현하는 무대를 중점에 뒀습니다. "20대 초반을 지나는 지금의 자신"을 투영한 음반입니다. 그레이는 보통 자전적인 일상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곡들을 주로 씁니다. 사랑과 이별, 우정, 유년기의 상처 등. 2집에선 본격 팝스타 수준으로 넘어가는 세련된 사운드를 빚어냈습니다.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프로듀서인 댄 닉로와의 공동작업으로 단출하지만 뿌연 선율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팝록(기타, 드럼, 베이스, 키보드) 편제로 서서히 사운드 스케일이 커지는 작업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 아픔의 세계"를 다뤘다고.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 KSPO 돔(구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코난 그레이(25)의 첫 단독 내한 공연.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이날 무대 뒤 걸밴드와 함께 라이브로 확장한 소리들, 커다란 핑크빛 단상과 장미 수십송이를 두른 마이크 스탠드, 시네마틱한 멜랑콜리의 필름 형상의 빔프로젝터들이 감싼 무대는 따뜻했습니다.
삶의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노랫말들을 공연과 줄곧 연결시켜내곤 했습니다. 소중한 친구를 잃고 난 뒤 쓴 'Astronomy'를 부르기 전 "여러분의 친구가 내가 됐으면 좋겠다"며 "에어 허그를 해봅시다" 하고, 부모가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상처에 관한 곡 'Family Line' 때는 "여러분의 과거나 가족이 여러분을 결코 정의하지 않는다는 걸 꼭 기억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번 앨범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에요. 저는 고통과 혼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고통이 내 삶을 규정지을까봐 두려웠어요. 그치만 지금 이 자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증명이에요. 당신도 원하는대로 될 수 있을 겁니다."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 KSPO 돔(구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코난 그레이(25)의 첫 단독 내한 공연에서 팬들이 빨간 라이트를 켜고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하는 모습.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이날 공연의 백미는 거의 전곡을 첫 소절부터 마지막 소절까지 따라부르는 Z세대 관객들. 관객들은 아련한 사랑의 곡 '아스트로노미(Astronomy)'와 '무비스(Movies)' 순간에 스마트폰의 플래쉬 불빛을 켰다가, 빨간 화면으로 전환하며 환해지다가 붉어지는 연출을 선물처럼 선사했습니다. 코난은 "이런 조직적(organized)인 광경은 처음 본다. 아름답다"며 감격했습니다.
패션과 음악, 무릎을 꿇고 멤버들을 소개하는 멋진 퍼포먼스로 공연장을 라스베이거스의 쇼처럼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레이의 80분의 공연이 끝나던 시기, 문득 장미의 의미가 궁금해졌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지만,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이 육감적인 청년처럼, 청춘이란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 KSPO 돔(구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코난 그레이(25)의 첫 단독 내한 공연의 주요 콘셉트였던 장미. 사진=라이브네이션 코리아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