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생명이 하나의 세계를 살다 갑니다. 뱀은 온도의 세계를, 박쥐는 초음파의 세상을 삽니다. 반면 인간은 그저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사는 데 만족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펜을, 때로는 마우스를 들고 빅뱅에 버금가는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며 새 세상을 창조해냅니다. 그렇게 연극 무대가 세워지고 영화가 개봉됩니다. 거울과도 같은 세상으로 초대된 관객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웃고 웁니다. 응시하는 관객,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관객을 아예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영화도 있습니다. 바로 게임입니다. 주체가 된 관객을 우리는 게이머라 부릅니다. 주말 아침 플레이스테이션을 켜는 아버지, 숙제 끝내고 컴퓨터 앞에 앉은 딸은 어느 세상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는 걸까요. 새롭게 준비한 코너 '이범종의 게임 읽기'는 게임 속 세상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이 이야기들의 만듦새와 구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 순서로 실시간 액션 롤 플레잉 게임의 기준을 세운 '디아블로'의 세계를 소개합니다. 게임의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디아블로를 배경으로 만든 소설들을 참고해 기술합니다. (편집자주)
불타는 지옥의 악마들이 인간세상인 '성역'을 침공하고 있다. (사진=블리자드)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드높은 천상과 불타는 지옥은 태초의 신 아누의 눈으로 불리는 '세계석'을 차지하려 '영원한 분쟁'을 벌입니다. 전쟁에 지친 천사와 악마들이 세계석을 빼돌려 낙원 '성역'을 만들었고, 여기서 혼혈종 '네팔렘'이 태어납니다. 성역의 운명을 둘러싸고 천사와 인간, 악마가 뒤엉켜 싸우기도 했지요.
이후 지옥에선 고위 악마들이 대악마 디아블로와 메피스토, 바알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성역으로 쫓겨난 대악마들은 대천사 티리엘과 마법학자 집단 호라드림에 의해 영혼석에 갇혀 각지에 묻힙니다.
세월이 흘러, 트리스트럼 지하 미궁에서 깨어난 디아블로가 레오릭 왕의 막내 아들 알브레히트 몸을 통해 환생합니다. 동생을 구하러 미궁에 들어가 디아블로를 무찌른 아이단 왕자는, 디아블로의 몸이 동생의 시신으로 복원되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 동쪽으로 향합니다.
아이단 왕자는 동쪽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걸까요. 전세계 게이머의 기다림 속에 2000년 출시돼 절망의 끝을 보여준 걸작, '디아블로II' 이야기를 지금 읽어드립니다.
정신요양원에 있는 마리우스가 자신에게 찾아온 대천사 티리엘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그는 상대에게 “그건 제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사진=블리자드)
'형제들' 구하러 떠난 어둠의 방랑자
햇살이 밝게 내리쬔 어느 날, 로브를 입은 남자가 정신요양원 창문 아래에 앉아 광채를 드러냅니다.
"아주 오랫동안 널 찾아다녔다, 마리우스."
마리우스는 자신에게 면회 온 남자의 하얀 불꽃 날개를 알아보고 억울한 듯 항변합니다. "용서하십시오 티리엘, 제발. 제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이 남자는 무엇을 변명하려는 걸까요.
디아블로가 쓰러지고 몇 주 뒤, 악마들이 트리스트럼을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아이단에게 무기를 벼려주던 대장장이 그리스월드, 해돋이 여관 주인 오그덴과 아내 가르다, 치유사 페핀, 의족을 차고 무기 팔던 소년 워트 등이 끔찍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포로가 된 케인은 악을 처단하러 나선 다섯 영웅의 도움으로 고향을 탈출합니다. 이들은 자카룸의 성기사, 동부 밀림지대에서 온 강령술사, 스코보스 제도의 아마존, 케지스탄 출신 원소술사, 아리앗 산맥을 타고 속세로 내려온 야만용사였습니다.
다섯 영웅은 케인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디아블로를 쓰러뜨린 아이단의 혼에 디아블로가 달라붙어, 옛날 호라드림이 가둔 대악마 둘을 풀어주러 가고 있다는 겁니다. 파괴의 군주 바알과 증오의 군주 메피스토가 풀려나면 성역은 그날로 끝장입니다. 케인은 아이단이 중얼거리던 말을 떠올리며 몸서리칩니다. "견딜 수 있을 줄 알았어."
한편 '어둠의 방랑자'가 되어 동쪽으로 가던 아이단은 높은 산속 주점에 들러 마리우스를 데려갑니다. 아이단이 디아블로의 영혼과 싸우는 의지가 약해진 틈을 타 솟구친 악마들이 가게를 불태운 뒤에 말이죠.
아이단 왕자는 트리스트럼에서 공포의 군주 디아블로를 해치운 뒤 ‘어둠의 방랑자’가 되어 동쪽으로 향한다. 그는 주점에서 자제력을 잃고 악마들을 소환해 사람들을 해치고 가게도 불태운다. (사진=블리자드)
앞서 대악마 셋을 성역으로 쫓아낸 고위악마 넷 중 안다리엘과 두리엘이 영웅들의 아이단 추격을 저지합니다. 케인은 안다리엘이 대악마가 인간의 잠재력을 이용해 지옥을 재탈환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안다리엘을 무찌른 영웅들은 아라노크 사막을 지나 루트 골레인에 도착했습니다. 과거 호라드림 지도자 탈 라샤가 바알을 몸에 가둔 곳입니다. 하지만 고통의 군주인 '구더기 왕' 두리엘이 이들을 막아섭니다.
이때 탈 라샤의 무덤에선 티리엘이 아이단을 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알은 마리우스를 조종해 탈 라샤의 몸에 박힌 호박 조각을 빼게 합니다. 해방된 바알이 탈 라샤를 조종해, 아이단과 함께 티리엘을 공격합니다.
대천사 티리엘이 탈 라샤의 몸에 깃든 '파괴의 군주' 바알과 싸운다. 그 뒤에서 ‘어둠의 방랑자’ 아이단이 티리엘을 저지하려 든다. (사진=블리자드)
평범한 인간의 도망···'파괴의 군주' 돌아오다
여기서 마리우스가 말한 '잘못'이 시작됩니다. 둘을 상대하기 버겁던 티리엘은 마리우스에게 바알의 영혼석을 지옥의 대장간에 가져가 부수라고 명합니다. 마리우스는 황급히 밖으로 달려갑니다.
영웅들이 탈 라샤의 묘실에 도착했을 때, 아이단과 탈 라샤는 이미 쌍둥이 바다 건너 동쪽 쿠라스트 항구로 향했습니다. 주요 종교인 자카룸의 성지 트라빈칼 사원에 도착한 이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밀실에 도착해 메피스토를 풀어줍니다. 자카룸 성기사와 간부 대다수는 이미 오랜 세월 메피스토에게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메피스토는 자카룸 총대주교(쿠에헤간)의 몸에 들어가 본래 형태를 되찾습니다. 300년 가까이 격리 수용된 대악마 셋이 모이게 된 겁니다.
아이단 왕자의 몸을 잠식해 자기 형태를 되찾은 디아블로. (사진=블리자드)
대악마들은 지옥을 되찾고 반역자들에게 복수할 계략을 완성합니다. 우선 성역의 근원인 세계석을 타락시켜 인류를 노예로 만듭니다. 노예가 된 인류가 가진 네팔렘의 잠재력을 조종하면 지옥의 반란 세력을 없애고 자신만의 제국을 만들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세 대악마는 힘을 합쳐 혼돈계 요새로 가는 차원문을 만듭니다. 이윽고 아이단의 몸에서 가시가 치솟았고, 육신을 되찾은 디아블로는 충심이 남은 악마들을 소집하러 차원문에 들어갑니다. 디아블로를 처치한 영웅 아이단이 디아블로가 되는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바알은 세계석을 타락시키러 북쪽으로 떠났고 메피스토는 성역에 남아 방해꾼을 막기로 합니다. 영웅들에게 맹공을 퍼붓던 메피스토는 다시 사파이어 영혼석에 갇힙니다.
데커드 케인은 한때 세계석을 보관했던 혼돈계 요새에서 처음 티리엘을 만납니다. 티리엘은 메피스토와 디아블로를 절멸할 방법을 알려줍니다. 파괴의 영토 깊은 곳 지옥의 대장간의 '소멸의 모루'에서 두 영혼석을 부수면 된다는 겁니다.
메피스토의 영혼석을 부순 영웅들은 디아블로도 해치우는 데 성공합니다. 쓰러진 디아블로의 육신은 이번엔 아이단 왕자로 돌아왔습니다. 영웅들은 동강난 아이단의 몸을 정중한 의식으로 감싸고 지옥의 화염에 던졌습니다. 디아블로의 영혼석도 지옥의 대장간에서 파괴됩니다(케지스탄력 1264년).
디아블로와 싸우는 성역의 영웅들. (사진=블리자드)
아이단의 영혼은 어쩌다 디아블로에 잠식됐을까요. 동생 알브레히트의 이마에 박힌 핏빛보석을 빼든 아이단은 자기 안에 디아블로를 가두기로 하고 영혼석을 스스로 이마에 박았습니다. 이에 대해 케인은 저서 '케인의 기록'에서 "처음부터 온 세계 최강의 무사들을 그곳으로 유인해서 그들의 힘과 의지력을 시험해보고자 했던 디아블로의 음모가 아니었을까" 의심합니다.
디아블로는 자신의 악을 가장 잘 담을 숙주를 찾았습니다. 레오릭 왕의 강직한 영혼을 지배하지 못하고 미치게 만드는 정도에 그쳤고, 알브레히트 왕자의 육체를 대체재로 삼은 뒤 아이단으로 옮겨간 겁니다. 하지만 케인은 다섯 영웅이 디아블로를 무찌를 때, 아이단 역시 내면에서 디아블로와의 싸움을 포기 하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천사의 빛을 보여준 사내가 마리우스로부터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진=블리자드)
불쌍한 '보통 사람' 마리우스의 최후
같은 시간. 바알은 쌍둥이 바다를 건너 세계석이 묻힌 아리앗산으로 갔습니다. 세계석으로 인류 전체를 타락시키는 순간, 영원한 분쟁의 판도가 뒤집힐겁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자신이 영혼이 갇혀있던 호박 영혼석이 필요했습니다. 그건 아이단이 데리고 다녔던 마리우스에게 있습니다. 마리우스는 어디에 있을까요.
앞서 탈 라샤의 묘실에서 대천사 티리엘이 영혼석을 파괴하라고 외쳤지만, 마리우스는 서부 반도로 도망쳤습니다. 이성의 끈이 얇아진 마리우스는 요양원에 감금됐고, 로브 입은 사내가 날개를 보여주자 "그건 제 잘못이 아니었다"고 변명한 겁니다.
"저는 실패했어요, 티리엘. 당신이 시킨 대로 하지 못했죠. 그 문으로 차마 못 들어가겠더군요. 용서하세요 티리엘. 제발 용서를···."
"그 돌을 주면 모든 걸 용서해주마. 이리 주거라, 마리우스."
호박 영혼석을 넘겨받은 남자는 마리우스를 다독입니다. "넌 실패하지 않았다. 네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해냈지."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합니다. "한데 난, 대천사 티리엘이 아니다."
남자가 영혼석을 자기 얼굴에 가져가자, 이글거리는 악마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절망한 마리우스가 머리를 감싸며 목 놓아 외칩니다.
대천사 티리엘의 모습으로 마리우스를 속여 영혼석을 받은 뒤, 본모습을 드러내는 바알. (사진=블리자드)
"바알!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세상에.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아니야, 안돼. 안돼!"
"흐흐흐···훌륭히 해냈다, 마리우스. 이제 답례를 하도록 하지."
"안돼! 안돼, 아아, 제게 왜 이런 일이···."
숨 멎은 마리우스를 뒤로 한 바알이 지나는 곳마다 불길이 일었습니다. 이제 바알은 자신의 파괴적 정수로 가득한 이 영혼석을 녹여 세계석에 부으려 합니다.
파괴의 군주 바알이 세계석이 묻힌 아리앗산을 지키던 야만용사를 죽이며 웃고 있다. (사진=블리자드)
성역의 근원, 세계석 사라지다
바알은 아리앗 산을 오르며 숱한 마을을 학살하고 죽은 자들을 악마의 병사로 일으킵니다.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를수록 영혼석의 파괴력은 커졌습니다. 아리앗산 기슭에 닿은 바알은 신성한 '세계의 심장'을 보호하는 야만용사 부족을 만납니다. 파괴의 군주는 수도 세스케론을 함락했고 산 중턱 성채 하로가스만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하로가스 장로들은 목숨을 희생해 거대한 방어막을 세웁니다. 바알이 공성전에 돌입할 때, 디아블로와 메피스토를 무찌른 다섯 용사가 티리엘 도움으로 이곳에 도착합니다. 이때 두 영웅이 여정에 합류합니다. 한 명은 배반자 마법학자를 처단하는 비밀결사대, 비즈자크타르의 암살자입니다. 또 한 명은 스코스클렌의 숲에서 온 드루이드입니다. 그는 자연의 힘을 빌려 다양한 야수로 변신할 수 있었습니다.
전사들이 바알의 공격을 막으려 고군분투 하는 동안, 하로가스의 장로 한 명이 배신합니다. 그는 하로가스를 더는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바알에게 야만용사들이 가장 신성히 여기는 '고대인의 유품'을 건네줍니다. 그 덕에 바알은 네팔렘 수호령의 방해 없이 세계석이 있는 산 중턱 밀실에 도착합니다. 반면 일곱 영웅은 악마는 물론 네팔렘 수호령을 거쳐 세계석 밀실로 힘겹게 도달합니다.
일곱 영웅이 바알을 해치웠지만, 이미 바알이 파괴의 조각을 세계석에 녹여 넣은 뒤였습니다. 망연자실한 전사들 앞에서 파괴의 기운이 수정체 곳곳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세계석이 인류의 마음을 타락시켜, 사악하고 폭력적인 존재로 만들게 된 겁니다.
티리엘은 결단을 내립니다. 그의 손을 떠난 엘드루인이 허공을 갈라 세계석을 찔렀습니다. 영원한 분쟁의 원인이자 성역과 그 세계 생명의 근원이 고막을 찢는 굉음을 내며 터졌습니다(케지스탄력 1265년).
티리엘의 검 엘드루인에 맞은 세계석이 폭발하고 있다. (사진=블리자드)
바알의 시체가 찢어졌고 그 영혼은 다른 대악마처럼 심연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티리엘의 육신도 사라졌지만, 세월이 흘러 복구됩니다. 아리앗산은 절반 이상 폭파됐고, 이제는 그 자리에 부글거리는 분화구가 남았습니다. 대기는 매운 연기구름과 목구멍을 파고드는 가루로 가득합니다. 한때 야만용사의 고향이던 이 지역은 이제 '공포의 땅'으로 불립니다. 세계석 파괴는 고대의 비밀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네팔렘의 능력이 다시 강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일곱 악마 중 다섯이 없어졌지만, 고위 악마인 죄악의 군주 아즈모단과 거짓의 군주 벨리알이 남았습니다. 데커드 케인은 남은 두 악마의 출현과 티리엘의 독단 행위에 대한 천상의 반응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봅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습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