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악당에게 배울 점

입력 : 2023-09-22 오전 6:00:00
"오래 걸릴 일이야. 당장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계속 해야 하네." 요즘 화제인 드라마 ‘무빙’에서 문성근 배우가 연기한 악역 민 차장의 말이다. 어릴 적에 본 만화에서도 종종 그랬지만, 악당들의 이런 성실함과 체계성에는 배울 점이 많다. 정부의 갑작스러운 내년도 R&D 예산 삭감 소식이 들려오던 터라, 크게 중요하지 않던 장면의 대사가 귀에 꽂혔다.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의 수사 신부였던 그레고어 멘델은 수도원의 정원에서 완두콩을 이용한 실험을 시작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그의 개인적인 연구는 7년 동안 지속되었다. 당시 그의 연구 결과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주류 과학계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후인 20세기가 되어서야 그의 발견이 재조명되었고, 오늘날 그의 연구는 현대 유전학의 기초를 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멘델은 '유전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발견은 유전자 개념의 기반을 마련했다. 유전자 편집과 mRNA 백신과 같은 오늘날 첨단의 과학이 멘델의 발견 위에서 자라났다.
 
오늘날 ‘AI의 대부’라 불리는 제프리 힌턴은 1986년, 인공신경망을 학습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역전파 알고리즘을 세상에 소개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에는 기계 학습 분야에서 인공신경망과 역전파의 개념이 거의 버려졌고, 컴퓨터 비전 및 음성 인식 분야에서는 이들을 무시하다시피 했다. 이론적인 흥미를 넘어서 쓸모가 있는 인공신경망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다수의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 컴퓨팅 파워의 향상과 데이터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심층 인공신경망의 학습에 대한 이론, 딥 러닝은 혁신적인 기술로 주목받으며 세상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힌턴의 연구도 새롭게 평가되었고, 그의 위상도 재정립되었다.
 
이런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명확하다. 연구나 노력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결과나 성과로 연결되지 않아도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특정 시점의 사회나 환경이 그 가치를 즉각적으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기술의 진보나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가치는 나중에야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단기적인 성과에 매몰되지 않고, 장기적인 시야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짧은 임기 내의 성과로 평가를 받는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이 긴 시야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이차전지, 초전도체, 양자컴퓨터와 같은 신기술 트렌드에 하루하루 휩쓸리는 개미투자자들이 받는 유혹과 별반 다르지 않다.
 
2021년을 전후로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유행하자, 다수의 지자체는 메타버스 사업을 열성적으로 추진했다. 그래서 탄생한 ‘메타버스 서울’에서 시민들은 주민등록등본을 신청할 수 있고, 가상의 캐릭터로 서울광장을 방문해 시장의 아바타와 악수할 수 있다고 서울시는 홍보한다. 방문자가 없어 골치라는 이 사업의 효용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혁신이나 트렌드가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 연구자도 정부도 유행에 너무 민감하지 않아도 된다. 당대에 멘델이나 힌턴의 연구가 훗날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좋은 정치가의 역할은 이런 위태로운 혁신과 도전이 쉽게 포기되지 않도록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과학이 좋은 과학 위에서 계속 자라날 것이다.
 
이철희 고등과학원 수학난제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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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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