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여당인 국민의힘이 22대 국회 개원과 함께 맨 처음 꺼내든 카드는 필리버스터였습니다. 채 상병 특검법안을 막으려는 시도였지만, 고작 24시간여 만에 강제 종료됐습니다. 소수 정당이 쓸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말이 무색한 결과입니다. 국민들의 큰 관심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2016년 무려 8일간 지속됐던 필리버스터가 화제가 됐던 것과는 딴판입니다. 그렇지만 국민의힘은 앞으로도 거대 야당의 법안 처리 때마다 필리버스터로 맞설 가능성이 큽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된다는 뜻이죠. 토마토Pick이 우리나라 필리버스터의 역사를 짚어봤습니다.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우리나라 필리버스터는
‘필리버스터’(Filibuster)란 주로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합법적 수단으로 의사진행을 지연시키는 행위를 뜻합니다. 해외에서는 장시간 연설이나 의사진행 및 신상발언, 각종 동의안과 수정안의 연속적 제의, 출석 거부 등이 이에 해당되는데요. 우리나라에서 필리버스터는 대체로 무제한 토론을 의미합니다. 국회법 제106조 2에 따르면 무제한 토론은 재적 의원 3분의 1 이상이 서명한 요구서를 국회의장에게 제출하면, 의장은 해당 안건에 대한 무제한 토론을 실시해야 합니다.
△필리버스터 관련 규정(국회법 106조 2)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서명한 요구서를 국회의장에 제출. 이 경우 의장은 무제한 토론 실시.
-의원 한 명당 한 차례만 토론 가능.
-무제한토론 진행시 종결 선포 전까지 산회하지 않고 계속 진행.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무제한토론에 대한 종결동의를 의장에게 제출할 수 있으며, 제출 24시간 후 무기명투표로 표결.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찬성할 경우 의결. 이후 해당 안건 표결.
-무제한토론 실시 중 회기가 끝날 경우 토론의 종결 선포로 간주. 이후 다음 회기에서 표결.
-종결이 선포된 안건에 대해서는 재차 무제한토론 불가.
2012년 이후 12년
필리버스터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무제한토론은 1948년 제헌의회 때 도입됐습니다. 1964년 초선인 김대중 의원이 5시간19분의 연설을 이어간 게 헌정 사상 첫 필리버스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당시 국회 최장 시간 발언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73년 의원의 발언시간을 최대 45분으로 제한하는 국회법이 수정되면서 사실상 폐지됐는데요. 이후 2012년 국회선진화법이 개정되면서 부활했습니다.
-2016년 필리버스터 : 테러방지법 반대를 위해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이뤄진 필리버스터입니다. 2016년 2월23일~3월2일까지 8일간 진행됐는데요. 약 43년 만에 무제한 토론이 시작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2019년 필리버스터 : 이때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공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놓고 충돌했습니다. 여야가 각각 2019년 12월23일~12월26일까지, 12월27일부터 12월29일까지 진행됐습니다. 의결에 찬성하는 쪽까지 참여한 최초의 필리버스터였습니다.
-2020년 필리버스터 :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국정원법,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 관련 필리버스터가 연달아 진행됐습니다. 특히 국정원법 개정안 반대 필리버스터가 12월10일~12월13일까지 진행됐는데,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이 무려 12시간47분 동안 연설해 현재까지 최장시간 발언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2022년 필리버스터 :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반대 필리버스터로 4월27일 검찰청법 개정안 필리버스터가, 4월30일 형사소송법 개정안 반대 필리버스터가 진행됐습니다. 두 필리버스터 모두 7시간을 못 넘기는 짧은 토론으로 종결됐습니다.
-2024년 필리버스터 : 채 상병 특검법에 반대한 국민의힘이 주도해 열린 필리버스터입니다. 2024년 7월3일~7월4일까지 24시간 20분 남짓 진행됐습니다. 무제한토론에 대한 종결동의안이 가결돼 종료됐습니다.
유의미한 성과는 한 번뿐
갈수록 힘 잃는 필리버스터
상술했듯 필리버스터는 다수파의 의사진행을 막기 위한 소수당의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필리버스터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따로 없습니다. 성과가 초라하기 그지없기 때문인데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필리버스터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것은 앞서 언급한 김대중 대통령의 1964년 필리버스터 한 차례뿐입니다. 무려 반세기 전의 일입니다.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준연 자유민주당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통과를 막아냈는데요, 공화장 정부가 주도한 부당한 구속동의안에 맞서 약 5시간19분 동안 발언함으로써 임시국회 회기를 마감, 구속동의안을 무산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역할을 못했는데요. 시간이 지날수록 의사진행 저지라는 기능을 상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16년 필리버스터 : 야권은 테러방지법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선거구 획정을 위한 공직선거법 등의 처리가 남았기 때문에 국회 정상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2019년 필리버스터 : 2019년 필리버스터는 12월26일 회기 종료와 함께 자동 종료됐습니다. 여당인 민주당은 회기가 종료되면 다음 국회에서 지체없이 표결 절차에 들어간다는 점을 이용한 ‘쪼개기 임시국회’를 진행했습니다. 국회를 종료함으로써 필리버스터를 강제로 끝내고, 바로 다시 임시국회를 열어 표결을 진행함으로써 강제로 법안을 통과시킨 것입니다.
-2020년 필리버스터 : 민주당은 코로나19 확산으로 긴박한 상황에서 필리버스터가 소모적이고, 토론에서 충분한 의견이 나온 것 같다며 종결동의서를 제출했습니다. 압도적 다수당이 종결동의서를 통해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료시키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죠.
-2022년 필리버스터 : 2019년과 마찬가지로 회기 쪼개기를 통해 검수완박 관련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기 국무회의가 예정됐던 5월 3일. 민주당은 이날 오전 검수완박 법안을 통과시키고 문 대통령은 같은 날 오후 국무회의에서 법안들을 통과시켰습니다. 검수완박은 민형배 의원의 ‘위장 탈당’, 민주당의 ‘회기 쪼개기’에 문 대통령의 ‘국무회의 연기’까지 이어져 여러 논란을 낳았습니다.
-2024년 필리버스터 : 필리버스터를 제안한 여당 의원들이 첫번째 연설 시작 직후부터 조는 모습을 보이는 등 시작부터 여론의 반감을 샀습니다. 저지하려는 법안 역시 국민들 찬성이 많은 채 상병 특겁법이었고요. 이번 필리버스터는 단 24시간여만 진행됐으며 2020년과 마찬가지로 종결동의서가 가결돼 강제 종료됐습니다.
목적도 의욕도 상실
무의미한 필리버스터
이처럼 필리버스터가 시간이 갈수록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필리버스터가 갖는 의미나 상징성마저 폄하될 일은 아닙니다. 소수당이 특정 법안이나 사안의 문제점 등을 국민들에게 충분히 알릴 기회를 보장받는 건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기도 합니다. 의회에서 소수 의견도 존중받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요. 다만 이를 보장받으려면 소수당의 결기가 필요한데, 이런 차원에서 이번 필리버스터는 역대 최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발언한 의원은 고작 7명. 총 발언시간은 24시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토론이 새벽까지 이어지면서 본회의장은 상당수가 자리를 비웠고 그나마 자리를 지킨 의원들도 휴대전화를 보거나 졸았습니다. 찬성 여론이 높은 채 상병 특겁법을 막으려 필리버스터를 진행하면서, 시작부터 졸거나, 희생된 군인을 고가의 장비에 비유하는 듯한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24시간의 필리버스터를 채우는 것으로 체면 치레를 한 뒤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하는 같은 패턴을 반복되고 있는 것이지요. 필리버스터를 하기 전과 달라진 게 없는 모습입니다. 진지한 내용의 반대 토론을 벌인 것도 아니고, 최소한의 성과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번 필리버스터에 무슨 의미가 있던 걸까요? 의미가 있긴 했을까요? 소수 의견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로서 그 의미가 작지 않은 필리버스터를 정쟁의 도구, 또는 무용지물로 만든 국회의 슬픈 자화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