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총비서가 정상회담을 한 판문점 평화의집 1층 접견실 벽에 걸린 두개의 시계(사진 =뉴시스)
[뉴스토마토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는 지난해 12월 30일에 신년사 격인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보고'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및 전쟁 중인 두 교전국"으로 규정하면서 동족 관계를 부정하고 통일 폐기를 천명했습니다. 이어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도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이라면서 이상의 '대남 노선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헌법에 반영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민족경제협력국 같은 국가기구와 그 산하 6·15공동실천 북측위, 조국통일범민련 남측본부 등 대남기구들까지 모두 정리했고, 평양으로 들어가는 남측 관문 격인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도 철거했고, 대남 선전·공작 매체 평양방송 송출도 중단했습니다.
적어도 2015년부터 세 가지 사전조치 취해
김 총비서는 '동족 관계' 부정과 '두 국가'라는 신노선을 위해 적어도 2015년부터 세 가지의 사전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나름으로는 꽤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는 얘기입니다.
우선 해방 70주년을 맞은 2015년 8월 15일에 독자적인 평양표준시를 선언했습니다. 이전까지 남북한이 함께 사용한 도쿄 표준시를 30분 늦췄습니다. 당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표준시간까지 빼앗는 범죄행위를 감행했다. 일제의 백년 죄악을 결산하고…"라며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시간까지 분단된 것이라는 점에서 남북한이 별개의 다른 나라라는 인식을 주는 효과가 더 컸고, 실제 '별개의 국가성 강화'가 그 의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정은은 2015년 이전에 이미 남북 관계에 대한 불만이 컸다”면서 "그는 국가정체성을 강조하면서 남한하고 긴밀하게 연동해서 뭔가를 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북한의) 주민들이나 간부들이 자연재해 등 어려움에 남한에 기대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표준시 얘기를 했다"고 그 배경을 설명합니다. (김정은 총비서는 약 3년 뒤인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이전 도쿄 표준시로 되돌리면서, "민족의 화해·단합의 첫 실행 조치"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가 큰 상황이었고, 실무적으로도 대남 사업 등 대외 사업에서 불편이 대단히 컸을 겁니다. 북한이 지난해 말과 올해 초 '두 국가 관계'라고 강조하면서도 표준시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실무적 불편함이 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국가제일주의'입니다. 우리국가제일주의는 2017년 11월 20일자 <노동신문>에 김정은 시대 경제성과를 제시하는 글에 처음 등장했고, 이어 같은 달 30일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 성공을 발표하는 기사에 재등장합니다.
'우리 국가제일주의 시대' 천명
그러다 김 총비서는 2019년 1월 1일 김 총비서 신년사에서 국가어젠다로 그 위상을 높입니다. "전체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정세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 국가제일주의를 신념으로 간직하고…"라며 '전민적 국가부흥시대의 새로운 이념'이라고 규정한 겁니다. 이달에만 <노동신문>에 우리국가제일주의 관련 사설과 논설이 8건이나 게재됩니다. 급기야 김 총비서는 2021년 1월 노동당 8차 당대회에서는 2016년 7차 당대회 이후 5년을 "우리 국가제일주의 시대"라고 까지 불렀습니다. 국가·국기·국화·국조 등 국가적 상징물을 부쩍 강조하면서,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에 '우리민족제일주의'를 강조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 번째는 8차 당대회의 당규약 개정입니다. 당이 국가를 만들고 지도하는 '당-국가 체제'인 북한 특성상 이번에 김 총비서가 개정을 지시한 헌법보다 당 규약 개정이 훨씬 중요합니다.
서문의 조선노동당의 당면목적 중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 혁명과업 수행' 문구를 삭제하고 '공화국 북반부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사회주의 사회 건설'로 대체했습니다. '대남 인민연대'를 상징하는 '우리 민족끼리'와 '사회의 민주화와 생존의 권리를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한다'는 문구도 삭제했고, '나라와 민족의 통일적발전'을 '민족의 공동번영'으로 수정했습니다. 당원 의무와 관련한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적극 투쟁해야 한다'는 부분을 빼 당원 역할에서 통일 관련 내용이 사라졌으며,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역할에서도 기존의 '혁명무력을 강화'를 '공화국무력을 지휘한다'고 수정해 국가 관련 표현을 늘렸습니다.
최은주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을 이를 "사실상 불가능해진 대남혁명전략을 폐기하고 남한과 북한이 두 국가로 존재하는 현실을 반영했다"며 "통일에 대한 지향보다는 남북한 공존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향으로 표현을 수정한 것"이라 풀이합니다.
김정은 북한 총비서가 지난 달 28일 신형 잠수함발사전략순항미사일(SLCM) '불화살-3-31형' 시험발사를 지도했다고 29일 북한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
그렇다면 이번 김 총비서의 ‘대남 노선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또 바뀔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가 60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4500km 거리를 달려가면서 북한에는 물론 전 세계적 화제가 됐던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지 않았다면, 문재인 대통령에 이어 윤석열정부가 집권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지금처럼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번 신노선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김정은의 신노선 바뀔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 등 현 정부는 총선 개입용이라고 규정합니다. 총선 국면에 활용해보겠다는 상투적 접근일 뿐입니다. 북한이 문재인정부에서 얻은 게 뭔가요? 민주당이 지배하는 국회에서 얻은 이득이 있던가요? 김 총비서가 "우리 제도와 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괴뢰들의 흉악한 야망은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고 한 건 애써 외면하는 건가요? 김여정 부부장은 문재인 전 대통령을 "영특하고 교활한 사람"이라 부르면서 "만약 제2의 문재인이 집권하였더라면 우리로서는 큰 일일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남북관계가 평화적인 상황이었어도 김 총비서는 중장기적으로 '두 국가' 노선으로 나아갔을 겁니다. 최소한 2015년부터 이런 기조를 준비해 온 것이 이를 방증합니다.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특히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남북 갈등이 더 격화하자,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신노선을 펼치고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정하면서 말입니다. 결국 김 총비서는 북한의 정체성을 '통일지향 분단국'에서 핵을 가진 '독자적 사회주의 국가'로 재구성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이제 남북한의 현실은 어쩔 수 없이 '적대적 두 국가' 체제로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