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선임기자] 역사적으로 가장 비싼 이혼 판결로 인해 SK가 경영권 위기에 봉착하게 됐습니다. 판결 당일 경영권 분쟁 가능성으로 지주사인 ㈜SK 주가가 급등하는 등 시장도 크게 출렁였습니다. 재판부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유입 등 정경유착을 인정해 분할 대상 재산을 책정한 부분은 상고심에서도 쟁점이 될 전망으로, 부정 축재가 법정에서 인정된 데 따른 사회적 논란도 불가피해졌습니다. '혼돈'입니다.
지난달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나란히 출석하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사진=연합뉴스
SK 지분 매각시 경영권 위협…대안으로 SK실트론 지분 매각 유력
31일 법조계와 재계에 따르면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측은 2심이 판결한 분할 재산 몫을 최태원 회장으로부터 현금으로 받게 됩니다. 최 회장이 SK 주식을 팔아서 1조3808억원을 마련할 경우 그룹에 대한 지배력이 급속히 약해집니다. 최 회장의 남은 지분과 동생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의 지분을 더해도 경영권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날 종가 기준으로 SK 시가총액은 11조5726억원이며, 최 회장이 보유한 지분 17.73%의 가치는 대략 2조원이 조금 넘습니다. 동생 최기원 이사장의 지분은 6.58%로, 8000억원에 미치질 못합니다. 산술적으로 최 회장이 보유 지분을 팔아 노 관장에게 줄 돈을 마련하고 나면 7000억원 미만의 지분만 남습니다. 동생 지분가치와 더하면 1조5000억원가량으로, 노 관장이 받게 될 금액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노 관장이 마음만 먹으면 경영권을 놓고 최 회장과 다툴 여지가 생기는 셈입니다.
물론 SK가 보유한 자사주가 25.5%나 되지만,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습니다. 기존 지배주주의 지배력을 높이는 효과를 낳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우호적인 기업을 끌어들여 자사주를 교환할 경우 의결권이 살아나 '백기사' 역할을 기대할 수 있지만, 이는 주주 환원 정책 차원에서 추진해 왔던 자사주 소각과 충돌을 낳습니다. 외국인 등 기존 주주들이 등을 돌릴 위험도 감내해야 합니다.
SK는 이미 경영권을 위협했던 '소버린 사태'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도 분식회계 등의 사법 이슈가 빌미가 돼 헤지펀드 소버린이 최 회장 퇴진을 요구하며 압박했습니다. 단기간에 1대주주까지 지분율을 끌어올렸던 소버린은 경영권 분쟁으로 주가가 급등하자 막대한 시세차익을 누리고 떠나 먹튀 논란까지 불거졌습니다. 이번에도 최 회장의 개인사가 그룹 전체 위기로 비화됐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닮아 있습니다.
경영권 위협의 악몽을 감안하면, 최 회장이 SK 지분을 대량으로 매도할 가능성은 아주 낮아 보입니다. 대안으로는 주식담보대출과 개인 부동산 매각, 비상장 주식 처분 등이 유력하게 거론됩니다. 주식담보대출의 경우 이미 4000억원가량이 담보로 잡혀 있어 추가 담보는 어렵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최 회장으로선 추가 대출에 따른 이자 부담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총수익스왑(TRS) 방식으로 SK실트론에 대한 간접지분 29.4%(7000억원 가치 추정) 매각설이 상대적으로 더 부각됩니다.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회사기회유용 문제로 시정조치 및 과징금 처분을 받은 점 또한 매각 가능성을 높입니다. 연장선에서 시장 전문가들은 전날 SK 주가 급등의 이유도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찾습니다. 최 회장이 현금을 마련하기 용이하도록 배당을 확대할 것이란 분석입니다.
2심 재판부는 대법원 확정판결 다음 날부터 실제 현금 지급 이전까지 연 5% 이자를 최 회장에게 부담하도록 했습니다. 1조4000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분할 재산을 감안하면 연 5%의 이자 부담은 최 회장의 현금 필요성을 더욱 크게 합니다.
대법, 2심 뒤집을 가능성 미미…비자금은 쟁점
지배주주 지배력에 미칠 충격이 큰 만큼 상고심 판결에 SK그룹의 운명도 달렸습니다. 법조계에선 이혼 재판에서 상고심 자체가 드문 데다 법률심인 대법원 특성상 사실심인 2심 판결이 뒤집힐 여지는 크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다만, 노 관장의 부친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유입 등을 비롯해 정권 차원의 무형적 도움 등을 인정해 분할 재산을 책정한 부분은 이례적이라 쟁점이 될 여지는 충분해 보입니다.
법조계 관계자는 “비자금은 형사사건 요소로 가사사건 재판에서 다루기 힘든 부분인데 노 관장 측 제출 증거가 효력이 있다고 본 듯하다”며 “이례적 판결이라 대법원 심리에서 다뤄질 여지는 있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원칙적으로 법률심이지만 중요한 사건에선 사실인정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며 “과거 형사사건에서 사실인정이 안 됐다면 심리를 해볼 여지는 있을 것 같다. 재산 형성에 기여한 정황 중 하나로 인정했는지, 판결문을 보기 전엔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2심 재판부는 300억여원의 노 전 대통령 비자금이 태평양증권(현 SK증권) 인수 때 활용됐다고 판단했습니다. 최 회장의 재산 형성 과정에 노 관장이 기여했다고 판결한 결정적 대목입니다. 당시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사돈인 최종현 선경그룹(현 SK그룹) 회장에게 비자금을 건네 태평양증권 인수에 사용됐다고 의심했지만 기소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간 최 회장 변호인은 SK 지분은 선대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특유재산으로, 분할 재산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노 전 대통령 비자금의 사용 용처에 대해선 "6공 비자금 유입 및 각종 유무형의 혜택은 전혀 입증된 바 없으며, 오로지 모호한 추측만을 근거로 이루어진 판단이라 전혀 납득할 수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비자금과 유무형의 도움 등은 사실상 정경유착으로 형성한 부정 축재를 인정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법원에서 판결은 불법과 합법을 떠나 실제 기여한 것을 인정해 판결하게 된다”며 “노 관장 측이 그 정도를 기여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부정축재에 대한 사법 처리는)시효가 끝났을 듯하다”며 “그렇지만 노 관장이 대국민 사과와 함께 분할 재산 몫을 국고에 귀속시킨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재영 선임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