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발 배임죄 폐지론…‘재벌 면죄부’

이사충실의무 강화 대신 “배임죄 폐지하자”
재벌 총수 과거 유죄 판결 다수가 배임죄
이재용·최태원 현 사법이슈도 배임혐의 걸려
학계 “배임죄 지우려고 상법 개정 운 뗐나”

입력 : 2024-06-19 오후 3:38:29
 
[뉴스토마토 이재영 선임기자] 상법 개정 논의가 배임죄 폐지론으로 번졌습니다. 과거 다수의 재벌 총수들이 배임 혐의로 기소되자 재계는 폐지론을 주장했었습니다. 이번엔 정부가 상법상 이사충실의무를 강화하려는 것에 대해 재계가 극렬 반발하자 대안으로 배임죄 폐지론이 등장했습니다. 학계에선 “배보다 배꼽이 크다”며 “애초 배임죄를 지우기 위해 상법 개정 운을 뗀 게 아니냐”고 의심했습니다.
 
 
재벌 사건 단골 배임죄…봐주기 논란
 
19일 정부 및 학계 등에 따르면 최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배임죄는 현행 유지보다 폐지가 낫다”고 밝히면서 논란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이 원장은 우선 이사충실의무 강화 골자인 상법 개정 필요성에 대해 정부 입장이 명확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신 재계가 주장하는 소송이 남발될 우려를 수용해 배임죄 폐지론을 꺼냈습니다.
 
배임죄 폐지론은 사실상 재벌 봐주기란 비판이 나옵니다. 배임죄는 재벌 총수일가가 엮인 사건에서 가장 많이 기소되는 범죄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수년째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삼성물산 합병 사건에서 배임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SK실트론의 회사기회유용 공정거래법 위반 사건에서는 검찰이 최태원 회장에 대한 배임죄 여부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과거 재벌 총수들에게서 유죄가 확정된 다수 사건들도 배임죄였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21년 사익편취행위를 적발했던 삼성웰스토리 사건의 경우 불법행위 수혜 대상인 총수일가는 고발을 면했고, 법인과 임원들만 고발돼 불구속기소됐습니다. 이에 여론 반감이 일자 공정위는 사익편취행위 적발 시 무조건 총수일가도 고발하도록 법 시행령을 고치려다 재계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공정위가 다른 사건에서도 총수를 고발하지 못한 이유는 사건에 관여한 증거를 잡기 어려워서였습니다. 여기에 배임죄가 폐지되면 고발할 혐의 자체가 사라집니다.
 
이사충실의무 위반으로 주주가 고발해도 배임죄가 없으면 상법 개정 실효성이 낮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이번 상법 개정은 법률 제382조의3에서 이사가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의무 대상으로 기존 회사 이익에 더해 주주 이익을 포함시키는 내용입니다. 과거 대법원은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에서 '이사충실의무 대상은 회사 이익에 한정된다'고 해석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2009년5월29일 선고)했습니다. 상법상 이사충실의무에 주주 이익이 포함됐다면 판결은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검찰이 이건희 선대회장을 배임 혐의로 기소했던 건입니다. 배임죄가 없으면 혐의 자체가 무효화 됩니다.
 
법조계 관계자는 “상법상 이사충실의무 위반으로 이사회가 송사를 치르더라도 해당 계열사 이사회 내 지배주주(총수)가 속하지 않거나 비등기임원이면 사건을 초래한 의사결정을 지시했더라도 책임을 묻기 힘들다”며 “그러면 거꾸로 이사회도 범죄 혐의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배임죄가 없으면 사기죄나 횡령죄를 적용해야 하나 구체적 실체가 없는 한 범죄사실 입증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상법 실효성 의문인데…배임죄 맞교환?
 
배임죄는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에 존재하거나 유사 처벌 가능한 규정이 있어, 국내만 없앨 경우 코리아디스카운트를 심화시킨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일례로 삼성물산 합병 사건에선 국내외 판결이 다른데 배임죄가 없다면 차이는 더 벌어집니다. 이재용 회장이 배임 혐의로 기소됐지만 1심 무죄 판결을 받아 항소심 재판 중입니다. 반면 미국계 투자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메이슨 캐피탈이 국가배상을 요구한 국제재판에선 모두 원고가 승소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정부는 엘리엇엔 이자 등을 포함해 1300억원을 물어줘야 하고 메이슨에도 438억원 배상금에 지연이자 등의 배상 책임이 생겼습니다. 비슷한 유형의 사건에서 만약 배임죄가 없다면 배상 책임은 피할 수 있으나, 투자자는 국내 투자를 꺼릴 수 있습니다.
 
배임죄는 형법과 상법,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에 각각 규정이 있습니다. 그간 이들 법률을 모두 개정하는 것은 어려워 재계는 경영 판단 원칙을 법상 적용해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이복현 원장 역시 폐지가 어렵다면 이 방법이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폐지론을 반대하는 쪽에선 그러나 경영 판단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폐지에 가깝다는 반응입니다.
 
애초 상법 개정도 실효성이 낮다는 관측이 시장에선 지배적입니다. 그 반대급부로 배임죄 폐지론을 꺼낸 것은 등가교환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앞서 회사에 대한 이사충실의무 규정을 들어 대우건설 소액주주들이 제기했던 주주대표소송이 있습니다. 이들은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등을 상대로 8년여 재판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했습니다. 하지만 대우건설에 대한 배상은 미미했습니다. 당시 4대강 담합 사건으로 대우건설이 물게 된 과징금 및 벌금이 284억원이었으나 대법원은 5억1000만원만 배상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후 주주대표소송이 제기된 사례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번 상법 개정 역시 실효적으로는 주주대표소송이나 다중대표소송이 쓰여야 하나 회의적이란 지적입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오너경영이라는 한국의 소유지배구조에서 이사회는 고무도장 역할만 하고 경영에 대한 감독과 견제가 전혀 작동이 안 되고 있다”면서 “배임죄마저 없다면 대주주의 사익편취와 대주주 이익을 대변하는 이사와 임원들의 일탈을 견제할 수 없게 된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는 또 “선진국에선 우리같은 소유지배구조가 없고, 징벌배상이나 디스커버리를 통한 민사소송이 활성화돼 있어 배임죄 필요도 덜하다”며 “재벌 개혁과 징벌배상 및 디스커버리 도입을 먼저해 선진국 같은 환경을 만들자고 이야기하는 게 순서다. 이런 상황에서 주주비례적 이사의 충실의무 도입은 최소한의 필요 조치인데, 배임죄를 폐지하면서 이사충실의무를 개정하는 것은 거꾸로 가는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이의송 군산대 경제학과 교수는 “배임은 형법에 처벌 규정이 있든, 없든 악의적인 것”이라며 “악한 일을 위해 어떤 의사결정을 하는 데 법적인 제재가 없으면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이사충실의무는 상시적으로 강조되는 것이고 배임은 결정적인 이권이 생길 때만 발생하는 것”이라며 “결정적일 때 정작 형법상 규제가 없다면 사건 피해는 치명적이어도 불법은 아니라서 거리낌 없이 자행된다. 곧 이사회 기능을 소멸시킬 것”이라고 경계했습니다.
 
이재영 선임기자 leealiv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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