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송정은 기자] 수년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부동산 계급표'라는 게시글이 올라왔습니다. 강남과 서초는 '황족'으로, 여의도와 잠실 등은 '왕족', 마용성(마포·용산·성동) 등은 '중앙귀족'으로 지역 간 줄세우기를 하는 표였습니다. 주거형태와 주거지역에 따라 일종의 계급이 나뉘는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이른바 '상급지'라는 곳을 선호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상급지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상급지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00거지'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일이 잦아지고 있고, 이는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도 서로 간의 계급을 나누는 용어로 굳어진 지 오래입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 단지 모습. (사진=송정은 기자)
아파트가 명함이 되는 '부동산 계급 사회'
26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지난 5월 서울 강남에서 초고가 아파트 분양을 준비하던 한 시행사가 상품 소개 과정에서 '부동산 계급화'를 연상케 하는 내부 방침을 밝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해당 아파트의 가구 당 분양가는 200억~300억원대 수준이었는데, 직업군과 자산규모를 따져 입주자 선별을 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분양 시장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습니다.
주택 가격으로 계급을 나누는 현상이 최근에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닙니다. 1967년 영국의 사회학자 존 렉스(John Rex)와 로버트 무어(Robert Moore)는 버밍엄(Birmingham)시의 스파크브룩(Sparkbrook) 지역을 연구하면서 도시와 사회 집단은 희소한 자원을 할당을 둘러싸고 투쟁의 역사를 이어나간다며 '주택계급론(Housing Class)'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도 지난 2008년 노동운동가인 손낙구 씨가 '직업과 소득보다는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자산 소득이 불평등의 잣대'라는 요지의 '부동산 계급 사회'라는 저서를 발간하기도 했는데요. 해당 저서에서는 주택 보유 형태에 따라 총 6개의 계급으로 나뉜다고 언급했습니다. 다주택자가 1계급, 집을 1채 보유하고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이 2계급, 집은 있지만 경제적 이유로 셋방살이 하는 사람이 3계급, 셋방살이 중 보증금 5000만원 이상이면 4계급, 5000만원 미만이면 5계급, 반지하나 옥탑방 등에 거주하는 주거 극빈층이 6계급입니다.
저서가 출간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부동산 계급표는 현재에도 유효합니다. 오히려 더 세분화됐습니다. 같은 강남 아파트라도 어떤 입지에 위치했는지, 임대아파트 거주민인지 아닌지, 전세 거주민인지 매매거주민인지 등 수많은 기준에 따라 계급이 다시 나뉘고 있습니다.
유치원생도 아는 '부동산 계급화'…혐오에 병든 사회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상급지에 살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멸시하고 비하하는 다양한 멸칭을 만들어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온라인은 물론 실제 현실에서까지 쓰이면서 사회적인 문제로도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래프= 뉴스토마토)
서울 서초구의 한 영어유치원 교사로 근무 중인 남정민 씨(가명)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강남 지역 영어 유치원을 다닐 정도의 아이들이다보니 넉넉한 형편의 아이들이 많은 편"이라며 "그런데 이 안에서도 이 어린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들었을까 싶은 혐오 표현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경우가 있다. 전세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도 못할 아이들이 전세거지라는 말을 쓰는 걸 보면 당황스럽다. 교육 차원에서 부드럽게 제지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임대주택 품질·인식 개선은 선택 아닌 필수
부동산 계급에 따른 계층 간 갈등, 지나친 혐오 표현 등이 몇년 간 사회 문제로 떠오른 만큼 존중과 배려를 통한 성숙한 시민의식 함양을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서진형 광운대 부동산법무학과 교수는 "가진 사람은 존중해주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성숙한 공동체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한국의 현실상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부동산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재화의 경우 이런 현상이 더 심각하다. 아이들마저도 혐오표현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부동산 상위계층의 기부를 통한 조세감면 제도 등이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민과 주거취약계층 들을 위한 임대아파트의 품질 개선도 짙어진 부동산 계급화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로 꼽힙니다. 오세훈 현 서울시장도 지난 2022년 '평형은 넓히고, 품질은 높이고'를 골자로 서울 내 공공주택 품질 개선안을 발표하기도 했죠.
경기도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내부 모습. (사진=송정은 기자)
일각에서는 주택공급률을 높은 유럽 선진국 사례를 들며 임대공공주택 수용계층 범위를 중산층까지 임의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서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임대주택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안전망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시세보다 저렴하게 공급되는 것 등이 그런 맥락이다"며 "시세보다 저렴하다는 측면에서 주택의 질까지 높아진다면, 즉 크고 좋은 집을 저렴하게 장기간 임대할 수 있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공급이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다는 의미한다. 따라서 임대주택의 수용범위를 중산층으로 넓히는 등의 무리한 시도보다는 임대주택을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게 운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습니다.
송정은 기자 johnnyso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