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과로와 스트레스가 주원인인 뇌질환으로 산재를 신청할 때 노동자들이 넘어야 할 문턱이 있습니다. 바로 근로시간입니다. 발병 전 12주간 주 평균 업무시간이 52시간을 초과해야 합니다.
절대적 기준은 아닙니다. 대법원도, 고용노동부도 근로시간이 산재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돼선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주 52시간에 못 미치는 노동자들의 산재 신청을 불승인 처분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노동자들은 행정소송을 통해서야 산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데, 공단 심사부터 근로시간에만 얽매여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6단독 윤성진 판사는 노동자 이모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전기공으로 일하던 이씨가 뇌경색증 판단을 받은 건 2021년 10월입니다. 당시 그는 건축주와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건축주가 전기배선작업이 끝난 콘센트 위치를 변경하라고 요구해 재시공을 2번이나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건축주와 심한 언쟁을 한 다음날 아침 그는 출근 중 응급실로 이송됐습니다. 그는 업무 중 심한 스트레스로 뇌경색증을 진단받았다며 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공단은 불승인 처분했습니다. 발병 전 12주간 주당 평균 업무시간이 44시간10분으로, 고용노동부 고시상 기준에 못 미친다는 이유였습니다. 산재 인정 기준을 정한 노동부 고시에서 뇌혈관 질병의 경우 발병 전 12주간 주당 평균 업무시간이 52시간을 초과해야 합니다.
52시간 미만인 경우 무조건 산재를 인정받을 수 없는 건 아닙니다. 교대제 업무,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 등 업무부담 가중요인을 살펴야 한다고 고시는 정하고 있습니다. 대법원 역시 노동부 고시상 업무시간은 업무상 과로 여부를 판단할 때 하나의 고려요소일 뿐 절대적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에선 주 52시간이 산재 신청의 걸림돌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씨를 구제한 건 법원이었습니다. 윤 판사는 이씨의 근로시간이 고시 기준에 못 미치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유만으로 인과관계를 부정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근로시간 외 업무부담 가중요인을 살폈습니다. 건축주의 요구로 이씨의 발병 당시 업무량이 일상적 업무량보다 30% 이상 증가한 점, 이씨가 다수의 공사현장에서 일하며 근무일정 예측이 어려운 점, 전기공 자체의 근무강도가 높은 점 등이 인정됐습니다.
이씨에게 당뇨·고지혈증 등 기저질환이 있어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병원 감정의견에도 윤 판사는 산재를 인정했습니다. 윤 판사는 “이씨가 정기적 치료를 받는 등 위험요인을 관리하고 있었다”며 “오히려 기존 질병에 업무상 부담이 함께 영향을 미쳐 상병 발병에 이른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판시했습니다.
이씨를 대리한 임채후 변호사(법률사무소 다원)는 “공단이 노동부 고시상 근로시간만을 근거로 일률적으로, 행정편의주의적으로 불승인하는 관행이 있다”며 “실제 산재 여부는 고시에 얽매이지 않고 구체적 사실관계를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