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승훈 선임기자] 지난 9월 초부터 서울시에 출입하면서 놀라웠던 점이 두가지였다. 하나는 밤 늦도록 보도자료 알림 톡이 온다는 것. 또 하나는 그 보도자료의 질이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보도자료가 양적으로 쏟아지면, 내용이 부실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만큼 서울시 공무원들이 일을 열심히 한다는 방증이었고, 그 뒤에는 '일중독'으로 불리는 오세훈 시장이 있어 보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3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브리핑실에서 열린 명태균 여론조작 사기사건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고소장 초안을 들어 보이고 있다.(사진=뉴시스)
실제 출입하면서 본 서울시는 48조원의 예산 규모로도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작은 정부'였다. 행정부의 각 부처를 빼닮은 국실이 서울시민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외로움을 치유하는 서울시, 기후동행카드, 디딤돌 소득 등 색다른 정책이 그 산물이다.
오 시장이 2022년 보궐선거로 당선됐을 때, 무상급식제도에 대해 그가 보여준 강경한 반대를 기억하는 유권자들은 큰 기대를 갖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 시장은 예전과는 달라진 행보를 보여왔다. 광화문 광장에 대형 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에 대해 언론의 비판이 집중되지 보류하는 과감함을 보여줬고, '약자와의 동행'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보수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털어내려 애쓰기도 했다. 그런 행보를 두고 시장 너머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런 가운데 9월까지만 해도, 오 시장이 내년 연말로 예정된 방미 일정 중에 대권 도전을 천명하리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내년까지는 시정에 전념하고 임기 마지막 해인 2026년에는 시장으로서 새로운 어차피 일을 벌이기 쉽지 않으니, 그 전에 대권 주자로 포지셔닝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시청 안팎에선 서울시 참모들 중 훗날 비서실장은 누구를 맡길 것 같고, 정무수석은 누구를 맡길 것 같다는 둥 ‘쉐도우 캐비닛’ 명단도 농담처럼 회자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세훈의 ‘큰 꿈’ 자체가 ‘헛꿈’으로 보이진 않았다.
실제 유튜버들을 비롯한 이른바 정치 평론가들 사이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유일한 대항마는 오세훈이라는 얘기가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동훈은 윤석열 아바타인 데다, 개인적 의혹이 많아 파괴력이 크지 않은데 비해, 오세훈은 관련 의혹이 많지 않고 이재명의 취약점인 여성 유권자층의 호감도 있어서 해볼 만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3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브리핑실에서 명태균 여론조작 사기사건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자신을 둘러싼 명태균 의혹이 연일 터지고, 윤석열이 비상계엄 선포라는 정치적 무덤을 자초하면서, 오세훈의 대권 꿈은 가뭇없이 멀어지고 있다. 지난 3일,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여론조사로 자신에게 도움을 줬다고 주장한 명태균·강혜경씨 등을 검찰에 고소·고발하며 반전을 노렸지만, 이날 밤 윤석열의 내란 행위로 결국 무의미한 해프닝이 돼버렸다. 이날 오 시장은 <뉴스토마토>와 <뉴스타파>를 콕 찍어 “범죄동조집단”으로 규정하며 고소 대상에 포함시키겠다고 강수를 두기도 했다. 긴급기자회견 자리에서 특정 언론을 거론하며 법적 대응을 밝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점을 볼 때, 이날 반격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다음날 예정된 해외 출장을 안 간다고 했다가 다시 간다고 번복하면서 언론의 뭇매를 맞았는데, 내란 사태로 인해 결국 출장을 가지 못하게 돼버린 것도 오 시장 입장에서 분통 터질 일이었다.
그렇다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태 직후 윤석열과 거리를 두며 승부수를 던질 절호의 타이밍이 있었지만, 애매한 스탠스로 비난을 자초했다. 계엄 반대와 함께 여당 내에서 가장 먼저 탄핵 찬성 입장을 밝혔다면, 정치적 입지를 다지며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계엄에는 반대하지만 계엄 사태를 가져온 것은 야당이라거나, 들불 같은 탄핵 여론에 기름을 붓는 윤석열의 적반하장 담화문이 나온 12일에야 탄핵 찬성 입장으로 돌아선 점 등은 두고두고 오세훈에게 뼈아픈 대목으로 남을 듯하다.
오 시장의 대권 도전 가능성은 점차 흐릿해지고 있다. 한 살 위인 윤석열이 법조 선배이자 정치 선배인 오세훈을 껴안고 낭떠러지로 떨어진 형국이다. 대권은커녕 다음 시장선거도 쉽지 않을 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서울시 고위 관계자도 “당장 대권 꿈은 포기한 거 같다”며 “보고하러 들어가면 딴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했다. 윤석열이 끝장나면서 오세훈도 벼랑 끝으로 몰렸다.
오승훈 선임기자 grantorin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