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교지편집부 소속이었기에 취재를 위해 집회 현장에 가야 할 때가 많았다. 취재 차원이었음을 굳이 밝히는 까닭은 내가 먼저 자발적으로 집회에 나선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집회와 관련된 기사는 가능한 피하여 집회에 나갈 일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 했고, 편집실 전체가 다 같이 움직이는 경우에 한해서만 마지못해 참여하곤 했다.
이처럼 집회를 꺼리다 보니 한번은 동기 중 한 명이 대놓고 물어본 적이 있다. 왜 그리 집회를 싫어하느냐고. 혹시 정치적으로 뜻이 안 맞아서 그러느냐고.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넘겼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었다. 자잘한 의견 차이는 있었으나 큰 범주에서 집회의 주장에 대개 동의하는 쪽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아무래도 ‘무용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가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무엇을 위해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 하나 더한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데 괜한 헛수고와 시간 낭비를 하는 것만 같았다. 행동한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어차피 해도 안 될 텐데. 그렇다면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며칠 전 남태령에서 이루어진 대규모의 연대 행렬을 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난 21일, 서울 남태령 고개에는 거대한 차벽이 나타났다. 16일부터 시작되었던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맹의 ‘세상을 바꾸는 전봉준투쟁단 트랙터 대행진’을 저지하고자 경찰에서 설치한 것이었다. 그렇게 행진은 막혔고 농민은 경찰과 차벽 사이에 고립되었다. 처음 인터넷에서 해당 뉴스를 접했을 때만 하더라도 안타까움을 느끼긴 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다고 여겼다. 대치 상태가 이어지다 그대로 물러서게 되리라 생각했다. 이제까지의 다른 많은 시위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상황은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유튜브를 본 2030 여성들을 필두로 시민들이 하나둘 남태령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렇게 모인 인원이 무려 1만여 명에 달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현장에는 추운 날씨를 대비한 각종 방한용품 및 배달음식 후원이 이어졌으며, 인터넷에서는 이들 단체를 후원했다는 계좌 인증이 끊이지 않았다. 지켜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풍경.
집회에 참석한 여성들은 이토록 추운 날씨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두렵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다. 함께하면 그나마 덜 무서우니까. 함께하면 그나마 이겨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왔다고.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 무박 2일간 버틴 시민들과 인터넷의 여론으로 인해 마침내 경찰이 손을 든 것이다.
트랙터는 남태령을 넘어 한강진까지 향했다.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환호하며 함께 기쁨을 누리는 시민과 농민들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과거의 나는 얼마나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던가. 해봤자 안된다는 말은 그야말로 무기력한 핑계였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변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나 하나 더해봤자’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 하나라도 더해야’를 생각해야 했다. 변화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나 하나라도’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이루어내는 것이었고, 그러한 변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 또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승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