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스법 따라 만든 반도체법…기업 책임 없고 특혜만

52시간 제외 여부로만 논의 한정돼 논쟁
미국, 과도 이익 환수 등 기업 책임 명시
사회적 공익적 가치 높이려는 성격 분명
"세금으로 지원하니 기업 의무도 담아야"

입력 : 2025-02-14 오전 8:20:00
[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박혜정 인턴기자]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할 목적으로 제정을 준비 중인 반도체 특별법이 국회에서 진통을 거듭하고 있습니다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적용’ 여부가 첨예한 논란으로 대두되면서, 반도체법이 모델로 삼은 미국의 칩스법(Chips and Science Act·반도체 및 과학법)과 달리 기업의 사회적 역할이나 책임에 대한 논의는 생략된 채 특혜로만 입법이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전문가들은 세금으로 특정 기업에 특혜를 주는 대신 책임도 함께 지운다는 미국 칩스법의 취지를 특별법에 반영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국회 본회의장 (사진=연합뉴스)
 
13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반도체 산업의 지원과 육성책을 담은 관련 법안은 여야를 막론하고 10건이 발의돼 있습니다. 모두 반도체를 미래 산업의 핵심 기반으로 규정하고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 가속화 상황 속 국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세부적으로는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와 지원을 위해 5년마다 기본계획을 수립·시행하고 반도체산업발전 클러스터를 지정하는 등 공급망 안정화 정책이 담겼습니다. 여기에 국가 전력망 및 용수 공급망을 확충하고 보조금과 연구개발 자금 지원, 그리고 세제 혜택 등 지원책이 총망라됐습니다.
 
하지만 발의된 특별법 내용 가운데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는 내용은 찾기 힘듭니다국민의 세금을 재원으로 활용해 일부 특정 기업에 특혜만 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반면, 첨단 기술 투자를 촉진하고 반도체 제조를 미국으로 다시 유치하도록 설계된 미국의 칩스법은 막대한 지원책 외에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확실하게 부과하고 있습니다미국 칩스법의 보조금 지급 심사요건을 보면, 보조금 신청 기업이 당초 제출한 전망치보다 과도하게 이익을 올리면 보조금 일부를 환수하고공장 직원과 건설 노동자에 보육 서비스 제공경제적 약자 채용 계획 제출 등 수혜를 받는 기업의 책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또한 보조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하지 않도록 하는 조항을 넣어 주주 이익을 위해 세금이 사용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기술 개발 및 도입을 지원하고 반도체 제조시설 및 장비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보조금 등 재정 지원을 하되, 공적 자금이 투입되는 만큼 기업의 사회적 의무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박종현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의 칩스법은 여성 노동자들이 가사 부담 없이 편하게 제조업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지역 사회의 복지를 높여 주는 사회적·공익적 가치를 높이자는 성격이 있다“하지만 반도체법은 국가에서 지원을 하면서도 노동시간을 늘려 일을 시키겠다는 차원의 얘기만 나오고 있는 정반대의 상황이라고 꼬집었습니다.
 
특히 박 교수는 특별법 적용 이후 반도체 기업의 실적이 개선됐을 때, 그 과실을 한 기업이 독식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반도체법이 생태계를 구축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지원을 받는 기업으로만 그 혜택이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기업, 노동자, 지역 등 가치 사슬안에서 참여하는 여러 이해 관계자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공유돼야 한다”며 큰 틀에서 국가 경쟁력 강화와 반도체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익적 가치를 제고한다는 규정성을 명확히 하고 이를 위해 지원을 해줌과 동시에 의무를 부과한다는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반도체 패브리케이티드 웨이퍼 (사진=뉴시스)
 
"현행 법으로도 52시간 초과 근무 가능"
 
현재 반도체법 제정의 가장 큰 쟁점은 52시간제 예외 적용’(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여부입니다. 반도체업계와 여당은 미래 핵심 산업으로 떠오른 반도체 분야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반도체법에 52시간제 예외조항이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 야당과 노동계는 이에 대한 반대 입장으로 서로 간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현재 반도체 산업과 같은 신기술 연구개발 노동자들은 업무상 특성을 고려해 유연 근무제 적용을 받고 있는데요. 최대 3개월까지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는 선택적 근로 시간제’, 근로시간 운영을 노동자 재량에 맡는 재량 근로제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삼성전자 등 재계는 반도체 산업 특성상 연구자들이 연구·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더욱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노동·시민사회단체는 이를 노동시간 장기화를 위한 의도라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김은정 참여연대 사회경제국 협동사무처장은 노동시간 연장은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R&D 인력 부분만 특정해서 예외를 적용한다고 해도 기업들이 일반 사무직, 생산직 인사 발령을 통해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악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봉수 강남노무법인 대표 노무사도 현행 법에서 R&D 업무는 근로자 대표와 서면 합의를 하면 52시간을 초과해 근무할 수 있음에도 이를 담은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이유가 현장에 있는 근로자까지 확대해 초과 근로를 하게끔 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근로 시간이 많다고 생산성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기에 초과 근무를 시키는 것은 근로자를 혹사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학계에서도 이번 예외 조항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예외를 터주면 그 체제가 지속 가능할지 우렵스럽다. 또 다른 분야에서 형평성 등을 토대로 예외를 요구할 경우 주 52시간제 도입 취지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라며 근로 시간에 대한 논의가 다양한 근무제로 확대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를 허물면 노동시간 제도 자체가 형해화될 위험성이 있다고 짚었습니다.
 
배덕훈 기자·박혜정 인턴기자 paladin703@etomato.com·sunright@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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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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