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작별하지 않는다' 초고를 다 쓰고서 택시를 탔는데 이 노래(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가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너를, 이후에 우리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별일 텐데'라는 가사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면서 사연 있는 사람처럼 택시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어느 인터뷰를 통해 밝혔듯, 음악은 단순히 노래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 삶의 선율을 자극하는 촉매제다. 또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자극제로서, 우리는 그것을 '영감'이라고 말한다.
시각적인 이미지뿐 아니라 바람 소리 같은 어떤 장면이 좋다거나 음악이 가진 정서가 있는데, 그 정서가 제 안의 것과 만나 '그래, 나 이것 쓰고 싶었어' 하고 문득 깨닫게 된다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지난해 6월16일 서울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에서 열린 악뮤 10주년 기념 콘서트 모습. (사진=YG엔터테인먼트)
누군가에게 음악은 고립감과 불안, 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가출한 열다섯 살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다룬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 음악은 내디딜 곳 없는 세상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워크맨의 배터리가 닳았을 때 "음악은 물에 쓸려 흐르는 모래 속에 삼켜져 버리듯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헤드폰을 벗어놓자 침묵이 들린다"고 말한 구절은 음악을 통한 주인공의 고찰을 엿볼 수 있던 대목이다.
인간은 모두 어두운 정적을 마주했던 인생의 첫 은둔을 딛고 각자 터득한 삶의 장단에 맞춰 자신을 두드린다.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And Wise> OST를 배경으로 한 영화 <비열한 거리> 같은 삶이거나 로버트 파머의 <Bad case of loving you> OST가 깔린 영화 <친구>의 한 장면처럼 기억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때론 <라붐>의 OST인 <Reality>와 같이 행복했고 애절했던 젊은 날을 회상할 수도 있다. 늘 거친 바람과 성난 파도일 것 같던 질풍노도, 그 삶의 과정은 오히려 가장 빛나는 시절이라 했던가.
아름다운 업적을 쌓아 올린 값진 인생이 지금이라는 걸 대부분 빛이 바래져가는 시간에 깨닫는지도 모른다. 교통비, 참가비, 통신비이던 용돈을 받자고 집회에 참가하는 건 어른의 품격이 아닐 터. 살아온 가치관을 한순간의 모래성처럼 무너트리며 집회용 알바를 뛰게 한 건 누구 탓일까. 가난한 성장으로 밀어 넣고 유혹한 마수의 손길은 비상식의 상식화를 낳고 있다.
지난달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에서 열린 윤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누군가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입을 닫고 지갑을 열어야 한다고. 말을 줄이고 돈을 많이 쓰라는 애기가 아니다. 늙으면 현명해져야 한다는 의미다.
'현명함'이란 무엇이든 올바르게 인식하고 슬기로운 사리 분별력에 있다. 어느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 했거늘. 음악은 삶의 선율을 노래하고 인간의 정서와 심오한 관계를 맺는다.
허나 풍류가 사라진 분절화 시대엔 비뚤어진 갓을 바로잡지 못하고 어리석은 식견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 고함만 난무하다.
인지적·사회적 발달과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올바른 정서와 염치는커녕 현대판 탐관오리를 추종하는 폭도들의 외침이 난잡하기까지 하다.
순교적 신앙을 위한 찬송은 온통 사이비·이단들의 찬양으로 타락했다. 혐오·차별·반지성·반역사성의 오염은 뉘우침이나 부끄러움조차도 모른다.
참회·속죄의 출발점은 부끄러움과 잘못에 대한 뉘우침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빳빳이 세운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에게서 보고 있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법은 배우질 못했나 보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