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와인의 운명을 빚는 세 요소

같은 밭, 같은 포도라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맛 달라져

입력 : 2025-04-18 오전 9:38:08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한 병의 와인이 탄생하기까지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시간이 얽힌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와인의 맛을 결정짓는 핵심은 무엇일까? 와인 애호가들과 전문가들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늘(날씨), 땅(떼루아), 사람(양조자).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와인의 운명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떼루아: 와인의 탄생지, 땅의 힘
 
프랑스어로 ‘땅’을 뜻하는 떼루아(terroir)는 단순한 토양을 넘어, 포도를 키우는 자연적 요소 전반을 가리킵니다. 햇빛, 강수량, 해발고도, 토양의 미네랄 성분, 바람 방향, 미생물 분포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포도 속 폴리페놀, 산도, 향기 물질(volatile compounds)의 구성을 결정하고, 궁극적으로 와인의 향과 구조감을 형성합니다.
 
프랑스 INRA(국립농업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같은 품종의 포도라도 떼루아가 다르면 와인의 향기 성분에 포함된 테르펜(Terpene)과 티올(thiol) 계열 화합물의 양이 최대 35%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수치는 와인에서 느껴지는 과일 향, 꽃 향의 강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입니다.
 
결국, 떼루아는 와인의 정체성과 개성을 결정짓는 ‘장소의 맛’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유럽 와인 문화가 ‘산지’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빈티지: 그해의 하늘이 만드는 와인의 성격
 
빈티지(Vintage)는 포도가 수확된 해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연도가 아니라, 그해의 날씨를 반영한 ‘시간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후가 포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직접적입니다. 고온 일수와 일조량이 많았던 해에는 당도가 높고 알코올 도수가 강한 와인이 만들어지며, 반대로 강우가 많았던 해에는 산도 높은 가벼운 스타일이 주를 이룹니다.
 
미국 UC 데이비스 와인학과 연구진은 1970~2020년 사이 보르도 와인의 빈티지와 기후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기온이 1°C 상승할 때마다 와인의 알코올 도수는 평균 0.13% 증가하며, 산도는 평균 6~10% 감소한다는 상관관계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기후변화가 와인 맛의 스타일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조자: 가장 인간적인 변수, 창조자의 손길
 
마지막으로, 같은 포도, 같은 조건일지라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와인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양조자(Winemaker)의 철학과 미각, 경험, 스타일이 모두 반영되는 창조적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와인 평가 기관인 와인 애드보케이트(Wine Advocate)나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는 동일한 떼루아와 빈티지를 가진 와인이라도 생산자에 따라 최대 10점 이상의 점수 차를 주기도 합니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와인 병에 반드시 양조자의 이름을 표기합니다. '같은 밭의 포도라도 누구 손에서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와인이 탄생한다'라는 철학이 뿌리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방영 중인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 (자료= 애플TV)
 
<신의 물방울>이 말하는 '천지인'의 조화
 
이 세 가지 요소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는 ‘천지인(天地人)’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됩니다. 하늘, 땅, 사람의 삼위일체가 이상적인 와인을 만든다는 철학을 표현한 것입니다.
 
와인을 소재로 한 드라마틱한 미스터리로, 와인의 세계를 철학적이고 예술적으로 풀어내며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신의 물방울>은 특히 주인공들이 와인의 정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통해 떼루아와 빈티지, 그리고 양조자의 조화가 어떻게 감동으로 이어지는지를 철학적으로 풀어냅니다. 이 작품은 와인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도 친절한 입문서 역할을 했고, 동시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와인의 감성적 해석'이라는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실제 와인 소비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이 작품에 등장한 와인은 실제로 매진되거나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까지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와인 속에 담긴 문화
 
프랑스 와인 문화의 핵심인 ‘뱅 드 떼루아(Vin de Terroir, 떼루아의 와인)’ 개념은 단지 미각을 넘어서, 특정 땅의 정체성과 문화적 가치를 담아낸다는 데 있습니다. 유럽연합의 와인 등급 체계도 이 개념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와인의 붉은빛 속에는 단순한 맛을 넘어, 한 지역의 자연, 한 해의 시간, 한 사람의 철학이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한 병의 와인은 ‘예술’이 됩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kos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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