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알프스의 빙하 동굴은 한때 장엄한 자연의 속살을 보여주는 창이었지만, 이제는 사라짐의 단면도가 되었습니다. 모르테라치 빙하(Morteratsch Glacier) 내부에 형성된 거대한 얼음 동굴은 알프스는 물론 전 세계에서 가속화하는 빙하 붕괴를 상징합니다. 빙하 붕괴가 언제 정점에 이르고, 얼마나 많은 빙하가 사라질지를 연도 단위로 제시한 연구 결과가 공개됐습니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ETH Zurich) 등 국제 연구진은 12월15일 학술지 <네이처 기후변화(Nature Climate Change)>에 실린 연구에서 2100년까지 전 세계 빙하가 몇 개나 남을지, 그리고 어떤 순서로 소멸하는지를 발표했습니다. 기존 연구가 빙하의 면적이나 질량 감소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연구는 ‘빙하 붕괴의 개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2041년 전후 ‘정점’ 예상
연구진은 이번 논문에서 ‘빙하 멸종의 정점(Peak Glacier Extinc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1년 동안 사라지는 빙하의 수가 최대에 이르는 시점을 뜻합니다.
스위스 모르테라치 빙하 속에 형성된 거대한 얼음 동굴은 알프스 빙하 붕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다. (사진=ETH Zurich)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C로 제한할 경우, 이 정점은 2041년 전후에 도달하며, 한 해 약 2000개의 빙하가 사라지는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반면 4°C까지 상승할 경우 정점은 2055년 전후로 늦춰지고, 연간 소멸 빙하 수는 약 4000개로 두 배에 이르게 됩니다.
기온이 더 오르는 상황에서 정점이 늦춰지는 이유는 역설적입니다. 초기에는 소형 빙하가 빠르게 사라지지만, 고온 환경에서는 중·대형 빙하까지 완전히 붕괴되기 때문입니다. 연구진은 “가장 큰 빙하까지 소멸하는 과정을 포착했다는 점이 이번 분석의 핵심”이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알프스는 전 세계에서도 가장 취약한 지역으로 꼽힙니다. 고도가 낮고 규모가 작은 빙하가 많기 때문입니다. 현재 각국의 기후 정책이 현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가정할 때 예상되는 지구 평균기온이 2.7°C 상승할 경우, 2100년 중앙유럽에 남는 빙하는 약 110개에 불과할 것으로 연구진은 추정합니다. 이는 2025년 기준 남아 있는 약 3000개의 3%만 남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이 4°C에 이를 경우, 남는 빙하는 20개 안팎으로 급감합니다.
연구진은 “빙하가 사라지는 속도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1973년부터 2016년 사이 스위스에서만 1000개 이상의 빙하가 사라졌다고 밝혔습니다. 이대로라면 중형급 빙하인 로네 빙하(Rhône Glacier)는 사실상 사라지고, 알프스 최대 규모의 알레취 빙하(Aletsch Glacier)마저 여러 조각으로 분절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 연구의 제1저자인 란더 반 트리흐트(Lander Van Tricht) 교수는 “지구상의 모든 빙하가 언제 사라질지 처음으로 연도를 특정했다”고 말했습니다. 기존 연구가 주로 전 세계 빙량이나 표면적 감소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이번 연구는 사라지는 빙하의 수, 그 지역, 그리고 소멸 시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낮은 고도나 적도 근처에 많은 소규모 빙하가 있는 지역이 특히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는 알프스, 코카서스, 로키 산맥은 물론, 저위도에 위치한 안데스 산맥과 아프리카 산맥의 일부 지역도 포함됩니다. 반 트리히트 교수는 “이 지역에서는 향후 10~20년 내 전체 빙하의 절반 이상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습니다.
알프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 온도 변화에 따라 록키 산맥에서는 1.5°C 시나리오에서도 현재 빙하의 25%만 남고, 4°C 상승 시에는 99%가 사라집니다. 안데스와 중앙아시아 지역 역시 1.5°C에서는 40% 이상이 유지되지만, 4°C 상승에 이르면 90% 이상이 소멸한다는 전망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4°C 상승 시 1만 8천 개, 1.5°C 상승 시 약 10만 개의 빙하만 남게 됩니니다. 한때 예외로 여겨졌던 중앙아시아 카라코룸 산맥조차 장기적으로는 감소를 피할 수 없으며, “더 이상 빙하 수가 유지되는 지역은 없다”는 것이 연구진의 결론입니다.
빙하 소실 예측 지도. 중부 유럽, 서부 캐나다 및 미국, 중앙아시아, 그리고 안데스 산맥과 아프리카 산맥의 적도 인근 저지대 산악 지역은 2040년 이전에 빙하의 절반 이상을 잃을 수 있다. 음영이 진할수록 빙하 소실 시기가 빠르다. (그래픽=ETH Zurich)
록키·안데스도 예외 없이 감소
빙하 소멸은 해수면 상승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형 빙하 하나가 사라지면 해수면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지만, 계곡 관광산업, 산악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 빙하호 붕괴 같은 자연재해 위험은 급격히 커집니다. 연구 책임자인 란더 반 트리흐트 박사는 “작은 빙하의 소멸은 바다 수면을 거의 올리지 않지만, 사라지는 순간 지역사회에는 결정적 타격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연구는 정책입안자나 관광산업, 자연재해 관리 분야가 미래를 대비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취리히 연방공대 연구진은 ‘세계의 사라진 빙하 명부(Global Glacier Casualty List)’를 작성해서 사라진 빙하들의 이름과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최근에도 여러 빙하들이 그 명단에 올랐습니다.
연구진은 지구 기온 상승 0.1°C 차이가 수천 개 빙하의 생존을 좌우한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파리협정이 지향하는 1.5°C와 그 이상의 온도 특히 4°C 차이는 완전히 다른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사라짐의 최대치’를 향해 가고 있는 알프스의 빙하들은 향후 10~20년이 빙하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고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