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방 식단이 간암의 주요 위험 요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방이 많은 식사가 어떻게 간세포를 암에 취약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진이 이 질문에 대한 분자 수준의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MIT 연구진은 고지방 식단에 장기간 노출된 간세포가 원래의 성숙한 기능을 잃고, 줄기세포와 유사한 미성숙 상태로 ‘회귀(reversion)’한다는 사실을 규명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단기적으로는 세포 생존에 유리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암을 일으키는 돌연변이에 훨씬 취약한 상태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 결과는 세계적인 학술지 <셀(Cell)>에 12월 22일 실렸습니다.
연구를 이끈 MIT 알렉스 샬렉(Alex K. Shalek) 교수는 “세포가 고지방 식단과 같은 스트레스 요인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생존을 위해 특정 행동을 취하게 되지만, 이는 종양 발생 위험 증가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고지방 식단은 간세포가 암으로 변할 가능성을 높인다.(이미지=Gemini 생성)
고지방 식단, 간세포 정체성 바꿔
연구진은 고지방 식단을 먹인 생쥐를 대상으로 간질환이 진행되는 전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단일세포 RNA 염기서열 분석(single-cell RNA sequencing)을 통해, 간 염증에서 섬유화, 암 발생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에서 유전자 발현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정밀하게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간세포들이 초기부터 뚜렷한 변화를 보였습니다. 세포 사멸을 억제하고 증식을 촉진하는 유전자들은 활성화하는 반면에, 정상적인 간 기능에 필수적인 대사 효소와 단백질 분비 관련 유전자들은 점차 꺼졌습니다.
공동 제1저자인 콘스탄틴 츠아나스(Constantine Tzouanas) 연구원은 “스트레스 환경에서 개별 세포의 생존을 우선하는 선택이, 조직 전체의 기능을 희생시키는 모습”이라며 “일종의 생존과 기능 사이의 맞바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됐습니다. 연구 기간이 끝날 무렵, 고지방 식단을 섭취한 생쥐 대부분에서 간암이 발생했습니다. 연구진은 미성숙 상태로 되돌아간 세포일수록, 이후 돌연변이가 생겼을 때 암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연구진은 간세포의 역분화를 조절하는 핵심 전사인자(transcription factor, 특정 유전자를 켜거나 끄는 단백질)들도 찾아냈습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이미 치료 표적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되는 후보는 SOX4라는 전사인자입니다. SOX4는 태아 발달기에는 활성화되지만, 정상 성인의 간에서는 거의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지방 식단 환경에서는 이 인자가 다시 켜지며, 간세포를 미성숙 상태로 몰아가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동물실험 결과가 인간에게도 적용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단계의 간질환 환자 조직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의 간에서도 정상 기능 유전자는 줄어드고, 미성숙 상태와 관련된 유전자는 늘어나는 비슷한 패턴이 관찰됐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유전자 발현 양상을 통해 환자의 생존 기간을 상당히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츠아나스 연구원은 “고지방 식단에 반응해 활성화되는 생존 유전자가 많이 발현된 환자일수록, 암 발생 이후 생존 기간이 짧았다”고 말했습니다.
MIT 연구의 개념도.(이미지=셀| ) |
사람 간도 같은 반응, 암 예후 예측
연구진은 생쥐의 경우는 암 발생까지 1년 남짓 걸렸지만, 인간의 경우 이 과정이 20년 이상에 걸쳐 서서히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세포 역전 고지방 식단은 염증과 간 내 지방 축적을 유발할 수 있으며, 이는 지방간 질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도한 음주 등 다양한 장기적 대사 스트레스도 유발할 수 있는 이 질환은 간경변, 간부전, 결국 암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연구진은 앞으로 정상 식단으로의 전환이나 GLP-1 계열 체중감량 약물이 이런 세포 변화를 되돌릴 수 있는지 연구할 계획입니다. 또 이번에 확인한 전사인자들이 간암 예방용 신약 표적이 될 수 있을지도 검증할 예정입니다.
샬렉 교수는 “고지방 식단이 간세포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한 분자적 그림이 처음으로 제시됐다”며 “이해가 깊어진 만큼, 환자의 예후를 개선할 새로운 치료 전략도 열릴 것”이라고 이번 연구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