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대 수명은 늘어났지만, 그만큼 ‘건강 수명’이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노화는 암, 당뇨, 알츠하이머와 같은 만성질환의 가장 큰 위험 인자로 남아 있습니다. 최근 과학자들이 단순히 ‘무엇이 고장 나는가’를 넘어, ‘세포가 노화에 어떻게 적응하고 구조를 변경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퍼즐 조각을 찾아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세포 생물학(Nature Cell Biology)>에 실린 밴더빌트대학교 크리스 버크위츠(Kris Burkewitz) 교수팀의 연구는 세포 내 거대 소기관인 소포체(Endoplasmic Reticulum, 이하 ER)가 노화 과정에서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밝혀냈습니다.
노화된 세포는 내부 구조를 극적으로 재구성하며, 핵심 세포 공장 일부를 선택적으로 분해한다. 이 새롭게 발견된 과정은 수명과 연관되어 있으며, 노화 관련 질환을 늦추는 강력한 표적이 될 수 있다.(사진=Vanderbilt University)
세포 내 소포체 재구성의 비밀
세포의 기능과 대사 효율성은 내부 소기관들이 얼마나 잘 조직되어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버크위츠 교수는 이를 ‘공장’에 비유합니다. “복잡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상상해 보라. 모든 기계가 갖춰져 있어도, 그 기계들이 올바른 위치와 순서로 배치되어 있지 않으면 공장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공간이 제한되거나 생산 수요가 바뀌면, 공장은 레이아웃을 재조정해야 한다. 이 조직화가 무너지면 생산 효율은 급격히 떨어진다.”
연구진은 세포 내에서 가장 크고 복잡한 구조물인 ER에 주목했습니다. ER은 단백질과 지질(fat)을 생산하는 핵심 허브이자, 다른 세포 소기관들을 지지하는 비계(scaffold)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노화된 동물 모델에서 ER의 구조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연구진은 시간에 따른 ER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새로운 유전학적 도구와 첨단 광학·전자 현미경을 활용했습니다. 노화 연구의 확립된 모델 생물인 살아있는 꼬마선충(Caenorhabditis elegans)을 활용했습니다. 이 벌레는 투명하고 수명이 짧아 과학자들이 노화 과정에서 온전한 생물체 내부의 세포 변화를 직접 관찰할 수 있게 해줍니다.
분석 결과 이번 연구의 핵심이 드러났습니다. 노화가 진행됨에 따라 세포는 ‘ER-phagy(소포체 자가포식 작용)’라는 과정을 통해 소포체의 특정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분해하고 리모델링하고 있었습니다. 단백질 생성에 관여하는 거친 소포체(Rough ER)의 양은 노화와 함께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반면에 지방 성분 생산과 연관된 매끈한 튜브 형태의 매끈한 소포체(Tubular ER)는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습니다.
이러한 불균형한 리모델링은 우리가 겪는 노화의 전형적인 증상과 일치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능성 단백질을 유지하는 능력(단백질 항상성)은 떨어지고, 대사 변화로 인해 원치 않는 곳에 지방이 축적되는 현상이 세포 수준의 ER 구조 변화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이번 연구의 제1저자인 에릭 도너휴(Eric Donahue) 박사는 “우리는 단순히 노화라는 퍼즐에 조각 하나를 더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섹션을 발견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연구진은 ‘소포체 자가포식 작용’이 단순히 노화로 인한 파괴 과정이 아니라, 수명과 직결된 ‘능동적인 리모델링’ 과정임을 밝혀냈습니다. 세포는 노화라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단백질 생산라인(거친 소포체)을 줄이고, 필수적인 대사 기능을 유지하려는 전략적 선택을 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소포체의 자기포식(ER-phagy) 과정 개념도(이미지=Nature)
신경퇴행성 질환 치료의 새로운 타깃
이번 발견은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과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 그리고 다양한 대사 질환의 치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버크위츠 교수는 “소포체의 변화는 노화 과정의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발생한다”며 “이것이 이후에 발생하는 세포 기능 장애와 질병의 ‘방아쇠(trigger)’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소포체 자가포식 과정을 조절하거나 소포체의 구조적 붕괴를 막을 수 있다면, 노화로 인한 만성질환의 발병을 늦추거나 예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는 셈입니다.
이 논문의 제목은 ‘소포체 리모델링은 노화의 특징이며, 소포체 자가포식 작용에 의존한다(ER remodelling is a feature of ageing and depends on ER-phagy)’입니다. 세포라는 미시적 공장의 ‘리모델링’ 비밀을 푼 이번 연구는, 인류가 꿈꾸는 ‘건강한 노년’을 향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키웁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