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사전·사후피임약' 재분류에 시장혼란 가중

입력 : 2012-06-11 오후 6:03:32
[뉴스토마토 조필현기자] #장면1. 휴일인 10일 오전 10시 신촌에 위치한 R산부인과. 아침부터 대기실이 환자로 북적거렸다. 이 병원 간호사는 “주말에 진료하는 산부인과가 인근에 이곳뿐이다 보니 환자가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열여섯 명의 환자 중 젊은 커플이 네 쌍. 그 중 두 커플은 사후피임약을 처방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진료를 마친 뒤 처방전을 받아 병원을 나서는 조모(여· 24세)씨는 “의사선생님이 물어본 거라곤 나이와 성관계를 가진 시간뿐”이라며 “이렇게 간단한 진료에 대한 진료비가 1만5000원이라니 너무 비싼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장면2. 같은 날 신촌의 000약국. 신촌의 약국들은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일요일에 문을 열고 있다. 이 약국 약사는 “다음달부터 사전피임약이 전문약으로 전환될 거란 정부의 발표에 사전피임약 ‘사재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말했다. “앞으로 사전피임약이 전문약으로 전환되면 진료비까지 약값 부담이 3배 정도 높아져 미리 사놓으려는 여자분이 많다”는 것이다. 사전피임약 구입 경험이 있다는 백모(여·23세)씨는 약국에서 만난 기자에게 “사전피임약을 복용하는 이유가 피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며 "여드름 치료나 생리주기를 규칙적으로 만들려고 복용하는 소비자도 있는데 앞으로 이용이 어려워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사전·사후 피임약 재분류 이후 시장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소비자들은 생활에 밀접한 약품에 대한 갑작스러운 정책변화에 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고, 제약업계도 덩달아 들썩이고 있다. 
 
특히 여러 목적으로 사전피임약을 장기복용해온 이들은, 그동안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고 믿었다가, 갑자기 '부작용'을 이유로 전문약으로 전환한 데 대해 당국과 업계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사전피임약, 장기복용해도 안전하다더니…"
 
사전피임약인 ‘머시론’을 수입판매하는 한국MSD, ‘마이보라’를 제조판매하는 바이엘코리아는 지금까지 사전피임약의 안전성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정부는 느닷없이 '부작용' 문제를 들고 나왔다.
 
취업 준비생 김모(여·26세)씨는 "장기 복용해도 안전하다는 말에 벌써 5년째 사전피임약을 복용하고 있다"며 “왜 지금와서 위험성을 부각시키고 부작용을 강조하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앞으로도 약을 계속 복용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전문약이 되면 부담이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어 황당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사전피임약을 피임 목적이 아닌 여드름 치료나 생리기간 조절용으로 복용했던 소비자들도 이번 정부 결정이 의약품에 대한 ‘선택권’을 제약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대학생 백모(여·25세)씨는 “시험기간이나 면접기간이 됐을 때 생리하는 게 불편해서 생리기간을 조절하려고 약을 복용해왔다”며 “이번 정부의 발표는 사전피임약의 용도를 ‘피임’으로만 전제해 다른 목적으로 약을 복용하는 여성들의 선택권을 제약한다”고 주장했다.
 
◇업계도 들썩들썩
 
업계는 업계대로 이번 결정에 따라 사후피임약 시장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등 희비가 갈리고 있다.
 
특히 사후피임약 ‘노레보정’과, 사후 120시간까지 피임을 보장하는 ‘엘라원’을 판매하고 있는 현대약품(004310)이 주식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약품은 지난 5일 1.97%가 오른데 이어 의약품 재분류안이 발표된 날 7.72% 올랐다. 지난 8일도 장 초반 한때 5% 넘게 상승했다.
  
‘노레보정’은 지난해 31억5000만원의 매출을 기록하면서, 사후피임약 50%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전체 시장은 약 60억원의 규모다.
 
현대약품 관계자는 “현재 ‘노레보정’이 피임약 시장에서 50% 이상 시장 점유를 보이고 있는데, 이번 의약품 재분류로 매출 상승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시장에서 매출 2위를 달리고 있는 사후피임약 ‘포스티노원’(바이엘코리아) 역시 매출 상승이 예상된다. ‘포스티노원’은 지난해 2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국내 사후피임약 시장은 최근 5년 간 시장규모가 32억원에서 62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커졌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이번 의약품 재분류에 따라 사후피임약이 일반약으로 전환되면 사후피임약 시장규모가 급격히 팽창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로 외자사들인 사전피임약 판매 제약사들도 정부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반발하는 분위기다. 그동안 안전하다고 주장해온 자신들의 주장이 한순간에 뒤집힌 것에 곤혹스러워하는 측면도 있다.
 
한 다국적제약사 관계자는 "사전피임약은 무엇보다 그동안 '안전성'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홍보해온 게 주요 전략이었다"며 "일방적으로 이를 부정하는 이번 정부 발표로 당황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후피임약 약국판매 논란도 진행형
 
사후피임약 약국판매에 대한 찬반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내년부터 사후피임약을 구입하면서 비싼 진료비에 대한 부담이나 사생활 노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 적게는 1만3000원에서 많게는 2만원까지 들던 의사 처방전 없이도 약국에서 손쉽게 사후피임약을 구매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을 찬성하는 이들은 사후피임약의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사후피임약은 최대 72시간 이내에 복용해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데, 휴일 연휴 등의 이유로 이 시기를 놓치면 자칫 낙태수술 등 더 큰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종교계를 중심으로, 이런 결정이 성윤리를 문란케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편, 올해까지는 사후피임약 구입을 위해 '비싼 처방전'을 받아야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새삼 불만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대학생 장모(여·23세)씨는 “사후피임약 처방을 위한 의사의 진단이란 것이 무의미하다"며 “관계 직후 수정이 됐는지 여부는 의사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지 않냐”고 반문했다. 그는 “해외에서는 피임약 처방을 위해 환자의 맥박을 재거나 혈액검사를 하는 등 부작용 가능성을 철저히 조사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진료 과정 없이 돈만 내면 처방전을 주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업계 관계자는 "피임약 시장은 규모로 보자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생활에 밀접한 약품이라는 점에서 소비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하다"며 "정부가 충분한 설명과 설득 과정없이 밀어부치기식으로 정책을 결정해 시장혼란과 불만을 부채질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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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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