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현대사회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다. 각종 규격화, 표준화의 힘을 빌어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이려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역설적이게도 개개인의 삶은 예측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는 길을 걸었다.
사회의 작은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이 자기 미래를 미리 헤아려 짐작하기란 이제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선택지를 앞에 두고 인간은 마치 노름하듯 배짱으로 차선을 택한다. 차선을 고를 배짱마저 없다면 그냥 머리 속에 생각만 가득 품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눈 뜨고 미소지은 채 말라 비틀어진, 몸통 뜯긴 북어대가리처럼.
연극 <북어대가리>는 삶의 중요한 결정을 회피한 채 남 좋은 일만 해주다 결국 버림 받고 마는 인간 존재를 '북어대가리'에 빗댄다. '알레고리의 작가' 이강백의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답게 공연에는 '북어대가리' 말고도 '창고', '창고지기', '상자' 등 삶에 대한 각종 은유가 풍성하게 흘러 넘친다.
무대에는 나무상자로 가득한 창고가 들어서 있다. 창고지기인 자앙과 기임에게 이곳은 삶의 터전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드나드는 상자들을 관리하며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수십년간 함께 일한 동료지만 둘의 입장은 살짝 다르다. 창고 밖의 삶은 생각해보지조차 않은, 성실한 창고지기 자앙에게 창고란 세상의 전부이자 소우주다. 하지만 적당주의자인 기임은 이곳 생활이 슬슬 지겹다.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터뜨리던 기임은 결국 창고를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쪽에 베팅한다.
창고지기들조차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나무상자는 인간을 소외시킨 노동의 상징으로 읽힌다. 상자들은 천정에 닿을 듯 빽빽하게 쌓아 올려져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매트릭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진실을 갈구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 마음의 감옥에 갇힌 상태가 바로 창고 속 자앙의 삶이다. 상자로 가득한 창고 모습은 설치극장 정미소의 헐벗은 무대와도 절묘한 궁합을 이루며 공연의 제 맛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진실은 시험하는 게 아니"라며 창고라는 소우주의 질서를 철석같이 믿고 있던 자앙이 무너지는 것은 상자 하나가 잘못 배달되면서부터다. 창고 안에서 벌어진 배달 실수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몰라 깊은 고심에 빠진 자앙 대신 창고에 물건을 운반해주는 트럭운전수의 딸 '미스다링'은 상자 속 내용물부터 확인하며 극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미스다링이 뜯어낸 상자 속에 담긴 것은 어디에 끼워맞춰질 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기계 부속품이다.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에도 수많은 유통자 중 일부에 불과한 창고지기에게는 배달 실수에 따른 컴플레인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그제서야 자앙은 최선을 다해 해온 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극 말미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대 위를 나뒹구는 북어대가리와 자앙의 모습이 오롯이 겹친다. 자꾸 엇나가는 동료 기임에게 '만약 우리가 이 창고 속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다른 창고에 들어가본들 행복할 수는 없어.' '하나가 잘못되면 모든 게 다 잘못되는 거야.'라고 설득했던 자앙이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93년 초연 당시 연극 <북어대가리>는 서울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마치고 전국을 순회한 후 로스엔젤레스와 오키나와에서도 공연되는 등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삶의 전부로 여겼던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받는 인간의 모습에 관객들이 진한 공감을 표한 덕분이다.
초연으로부터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세월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시대를 초월한 극작의 힘과 감각적인 연출의 힘 외에 자연스럽게 배역에 녹아든 배우의 힘이 20년 전 연극을 '오늘의 연극'으로 만들었다.
트럭운전수 역할을 맡은 김종구는 걸쭉한 목소리와 특유의 호방함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과시했다.
기임으로 분한 배우 김은석은 기존에 주로 선보였던 지적인 이미지를 완벽하게 지우고 '날라리 창고지기'의 하류인생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각종 연극상을 수상했던 배우 박완규는 이번에도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바른생활의 표본인 자앙을 훌륭히 소화했다. 미스다링을 맡은 배우 박수현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발랄함을 과시하며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든다.
작 이강백, 연출 구태환, 출연 김종구, 김은석, 박완규, 박수현. 23일까지 설치극장 정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