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11월이다. 자연이 죽음을, 생명의 소멸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가톨릭에서는 11월을 위령 성월(Month of the Dead)로 지킨다고 한다.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고 죽음에 대해 묵상하도록 종교는 시간을 따로 떼어놓았다. 산 자에게 모처럼 귀한 기회다.
외젠 이오네스코의 희곡을 바탕으로 극단 동네방네가 만든 연극 <왕, 죽어가다>의 시간적 배경도 11월이다. 세상을 호령하던 왕 베랑제가 이 늦가을, 겨울 초입에 죽어가고 있다. 더불어 그의 세계도 사라져간다. 무대 위에는 이 소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만 남아 있다. 인생의 무상함과 더불어 권력의 무상함까지 읽힌다.
60년대에 쓰여진 희곡이지만 <왕, 죽어가다>는 유한한 삶과 영겁의 죽음이라는 통시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단은 따로 손 볼 필요 없는 희곡은 그대로 두고 무대에 몇 가지 상징적 장치들만 추가했다. 원뿔모양의 안전 표지판, 사라져 가는 왕좌, 왕이 신는 곰 발바닥 슬리퍼, 왕을 모시는 줄리엣이 메고 있는 배낭 등이 동시대 관객과의 접점 역할을 한다.
무대는 기본적으로 계단과 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얼핏 보면 단순한 구조지만 배우의 풍성한 비즈니스 덕분에 극이 진행될수록 공간은 의미로 가득 찬다. 왕궁 곳곳에서 보이는 쇠락의 징조, 즉 구멍난 공간에 줄리엣은 안전 표지판을 세운다. 그러나 왕은 결국 구멍에 발을 헛디디고 먼지로 뒤덮인 백발의 모습으로 기어나온다. 죽음이 가까워오면서 눈과 귀를 먼 채 사경을 헤매는 왕의 모습은 계단식 공간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는 모습으로 절묘하게 표현된다.
부조리극의 큰 특징인 희극성도 놓치지 않았다. 슬리퍼조차 제대로 신지 못하면서 죽기는 싫어 진상을 부리는 왕의 모습, 시종일관 엄격한 태도로 '연극이 끝날 무렵이면 돌아가십니다'라고 말하는 늙은 왕비 마가릿, 마리오네트 같은 움직임과 합창으로 희망의 덧없음을 표현해 낸 젊은 왕비 마리와 줄리엣 등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인다.
특히 베랑제 역을 맡은 배우 김종태는 꽉 짜여진 행동들로 무장한 채 극장공간에 의미를 부여해나갈 뿐만 아니라 관객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간다. 배우의 시선을 통해 관객은 객석에 앉아 있는 것 자체로 이미 죽은 자와 새로 태어나는 자, 즉 인류 전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배우가 그저 무대에만 머물지 않고 관객석까지 적극적으로 시선을 확장하면서 이 극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왕'은 결국 '나'의 다른 이름이다. 이 극은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서 왕 노릇을 하면서 살아가는 나, 베랑제의 말처럼 끊임없이 나만 보고 있는 나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을 내어 죽음에 대해 묵상하지 못한 자, 겸손하지 못한 자에게 죽음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속삭인다. '권력이라는 병에 걸려 무리하게 결단했다'고, '인간이라는 미지근한 물에 몸을 담갔지만 이제 그 물이 얼려 하고 있다'고, '인정하세요' 라고.
작 외젠 이오네스코, 연출 유환민, 번역 이정은, 각색 김덕수, 드라마터그 정영훈, 출연 김종태, 최희진, 정다움, 이형훈, 무대 최수연, 조명 김소라, 의상 강기정, 음악 김지은. 12월 2일까지 CY씨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