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꿈을 찾지 못하고 현실에 치이기만 하는 아이들, 제 역할을 못하는 부모와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그리 새롭지 않다. '노랑고등학교' 합창반 친구들과 주변 이야기를 담은 국립극단 청소년극 <빨간 버스>도 얼핏 보면 마찬가지다. 극의 개요만 놓고 보자면 사회비판의식을 적절히 섞어 만든 학원물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이 연극에는 여타의 학원물과는 조금 다른, 묘한 표정이 있다. 차별지점은 일차적으로 작가 겸 연출의 독특한 시선에서 비롯된다.
작, 연출을 맡은 박근형은 미성년자인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동정심이나 안타까움, 분노 등의 잉여감정을 모조리 지운 채 마치 고정된 카메라처럼 시종일관 냉정한 시각을 유지한다.
이 극의 주인공은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는 여고생 세진이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모범적인 것으로 평가받던 학생이지만, 마트에서 분유를 훔치다가 걸리는 바람에 남 몰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발각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아 키우고 있는 세진을 부모와 학교가 품어주지 못하면서부터 연극의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진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 앞에서 세진은 끝까지 함구하고, 결국 자퇴를 권고 받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서 연극이 자신의 삶을 꿋꿋이 헤쳐나가려는 세진이에게 아예 출구를 봉쇄해 버린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쫓겨나 거리로 나온 세진은 자신의 과거와 기억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은 결국 돈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하지만 이내 사고를 당하고 만다.
'현실이 이렇다'라고 차갑게 보여주는 것이 박근형식 위로라면 위로의 방식인 셈이다. 극중에서 이혼한 엄마, 세진, 세진의 아기 등 극중 세 인물은 모두 세진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데, 연출은 엄마로 상징되는 '과거'와 세진으로 상징되는 '현재'를 모두 부정적인 세계로 인식하고 아기로 상징되는 '미래'에만 희망을 남겨둔다.
현실의 냉혹함을 겪는 것은 비단 세진뿐만이 아니다. 기성사회의 굳건한 질서 밑에서 아이들은 저마다의 진통을 겪는다. 극에는 잠 자는 것 외에 노래만 하고 싶다는 학생, 가족에 무관심한 어머니보다는 바람 난 아버지가 차라리 안쓰러운 학생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위로해 줄 어른이 없고, 아이들도 더 이상 위로를 기대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저 계속 견뎌낼 도리밖에 없다.
무대는 이같은 냉정한 현실인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닥에는 대각선으로 교차하는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고 길 끝마다 신호등이 서 있다. 세진의 위기 상황은 신호등의 색깔 변화로 표현된다. 빨강, 노랑, 파랑 색깔이 번갈아 켜지던 신호등은 이윽고 극이 전개됨에 따라 빨강과 파랑, 빨강과 노랑, 빨강 등으로 바뀌면서 출구 없는 세진의 상황을 대변한다.
아트모스피어가 작곡한 음악과 노래 역시 극 전체의 분위기를 적절히 암시한다. 배우들의 입에서 노래와 랩까지 나오는데 무대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노랑고등학교' 여고생들과 또래 친구들이 이미 세상을 눈치챈 까닭이다.
꿈과 희망을 싣고 달리는 노란색 통학 버스가 알고보니 위험천만한 곳으로 내달리는 빨간 버스라는 게 연극 <빨간 버스>를 통해 드러나는 작연출의 인식이다. 극은 비단 아이들의 이야기에만 치중하는 게 아니라 무대 위 어른들의 모습들을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지금 우리 사회의 사고방식, 세계관에 대한 것으로 이야기의 외연을 넓힌다.
'이런 세상에서 계속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연극 <빨간 버스>는 비로소 운행을 멈춘다. 박근형 연출의 이전 극들에 비해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요소는 다소 적긴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착잡한 심경으로 무대를 바라보며 느낌표와 물음표를 던지게 하기에는 충분한 연극이다.
작·연출 박근형, 출연 강지은, 곽성은, 안준형, 이봉련, 김정민, 김동원, 신사랑, 이은희, 12월 16일까지 국립극단 소극장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