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긴급조치 1·2·9호 모든 면에서 위헌"(종합)

"근거 규정인 유신헌법 53조는 직접 적용규정 아니다..심사 제외"

입력 : 2013-03-21 오후 5:04:29
[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헌법재판소가 유신헌법 53조에 근거한 대통령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번 결정으로 과거 유신체제하에서 선포된 긴급조치 1·2·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처벌받은 피해자들의 재심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21일 오모씨가 긴급조치 1·2·9호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다며 청구한 헌법소원심판 사건에 대해 재판관 8명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위헌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다만, 긴급조치 1호 등의 근거가 된 유신헌법 53조에 대해서는 긴급조치를 발령할 수 있는 근거규정일 뿐 오씨에 대한 재판에 직접 적용되는 근거규정이 아니라는 이유로 심판대상에서 제외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기본권을 제한하기 위한 입법목적의 정당성과 방법의 적절성 ▲죄형법정주의 ▲참정권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 및 신체의 자유 ▲재판을 받을 권리 등 모든 면에서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했다.
 
1974년 1월8일 시행된 긴급조치 1·2호는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비판 또는 개정 등의 주장을 금지하고 유언비어 날조나 유포하는 행위를 금하면서 위반자를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해 처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위반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규정하면서 15년 이하의 징역과 자격정지를 같이 선고할 수 있게 했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
 
재판부는 먼저 긴급조치 1호에 대해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반대하고 폐지를 주장하는 행위 중 국가긴급권의 발동이 필요한 상황과는 전혀 무관하게 헌법과 관련하여 자신의 견해를 단순하게 표명하는 모든 행위까지 처벌하고, 처벌의 대상이 되는 행위를 전혀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으므로, 표현의 자유 제한의 한계를 일탈했다"고 판시했다.
 
또 "헌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고 다른 내용의 헌법을 모색하는 것은 주권자이자 헌법제·개정권력자인 국민이 보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가장 강력하게 보호되어야 할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요소인 국민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헌법개정절차에서 가지는 참정권적 기본권인 국민투표권 등의 권리, 청원권 등을 지나치게 제한해 위헌"이라고 밝혔다.
 
◇유신헌법에 대한 견해 표명 처벌..자의적 형벌권 행사
 
아울러 "유신헌법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단순하게 표명하는 모든 행위까지 처벌하고, 긴급조치 1호 자체를 비방한 사람까지 그 처벌로 '15년 이하의징역 및 자격정지'라는 중형을 부과하도록 한 것은 범죄와 형벌 간의 균형을 현저히 잃은 것이고, 이는 국가 형벌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광범위한 정치적 의사표현행위를 범죄로 처벌하면서도 어떠한 제약 조건도 두지 않은 긴급조치 1호 5항은 긴급조치 위반자 및 비방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법관 영장주의의 본질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2호에 대해서도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발의·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라는 범죄의 구성요건이 추상적이고 모호해 적용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어서 국민이 무엇이 법률에 의하여 금지되는 행위인지를 예견하기 어려워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의 원칙'을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수사관이 스스로 영장발부..영장주의 본질 침해
 
이와 함께 "긴급조치 제2호 제12항은 수사기관인 검찰관이 스스로 영장을 발부할 수 있도록 해 법관에 의한 구체적 판단 없이 인신구속을 비롯한 수사상 강제처분이 가능하도록 하면서도, 이에 대해 법관에 의한 아무런 사후적 심사장치도 두지 않은 것은 국가긴급권이 발동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지켜져야 할 영장주의의 본질을 침해한 것"이라고 위헌 사유를 밝혔다.
 
◇헌법재판소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 정치관여 등을 금지시킨 긴급조치 9호 역시 재판부는 "유신헌법의 제·개정 논의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어 국민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침해하고 헌법개정권력주체인 국민의 주권행사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뒤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금·압수 또는 수색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 역시 헌법상 보장된 영장주의의 본질을 침해한다"고 판시했다.
 
◇허가 없는 학생집회에 소속학교 폐쇄..학문의 자유 침해
 
재판부는 특히 "허가받지 않은 학생의 모든 집회·시위와 정치관여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학생의 제적을 명하고 소속 학교의 휴업, 휴교, 폐쇄조치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은 집회·시위의 자유,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성 내지 대학자치의 원칙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씨는 1974년 5월 버스에서 우연히 동석한 여고생에게 정부시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1주일간 감금된 뒤 긴급조치 위반사실과 당시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수배 중인 처남이 있는 곳을 자백할 것을 강요당하며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후 비상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된 오씨는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은 뒤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뒤 수감돼 만기 출소했다.
 
오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재심권고 결정에 따라 2010년 서울고법에서 재심을 신청하는 한편 긴급조치 해당조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으나 이미 폐지된 법령이라는 이유로 무죄가 아닌 면소판결을 받고 심판 제청마저 기각되자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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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