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가 산업은행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작년 11월 중순은 이미 글로벌 금융위기가 국내로 파급돼 자금줄이 말라붙던 시기였다. 국내외 금융기관 중에서는 한화의 대우조선 인수 자금을 빌려줄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한화는 무모하게 대우조선에 달라붙었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과정에서 자금조달에 문제가 없다던 한화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로 자금 조달이 어렵다며 잔금 분할 납부 등을 요구했다. 떼를 쓰기시작한 것이다.
이후 한화는 대우조선 지분 51% 중에서 30.2%만 우선 인수하고 나중에 잔여 지분을 매입하는 지분 분할 인수 방안을 수용해달라고 제안했다.
산은 관계자는 "당초 매각 입찰 계획을 발표하면서 지분 분할 인수 방안도 가능하다고 했다면 한화 외에 더 많은 입찰자들이 몰렸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화가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며 "한화의 요구를 수용해주면 특정 기업에 특혜를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산은 측은 MOU 체결 이후 시장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한화가 금융위기로 자금조달이 어렵다고 호소해 '인수 의지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증권업계의 M&A 전문가는 "한화가 대우조선 인수를 추진하는 것 자체가 분수에 넘치는 것"이라며 "처음 한화가 인수를 시도할 때부터 시장 내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봤다"고 전했다.
또 다른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금융위기 상황에서 한화가 정말 6조원대를 지불하고 대우조선을 인수했다면 대한생명 등 다른 계열사들의 부실을 키워 그룹 전체가 위기에 몰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화는 다른 입장이다. 인수계약 추진의 필수 절차인 실사를 대우조선 노조의 저지때문에 하지 못해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화는 "실사를 하지못해 대우조선의 실질 가치를 모르는 상황에서 계약을 체결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서 "산은은 노조와의 사전협의를 한화에 요구해 원활한 실사를 진행하지 못한 근본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한화는 또 금융시장이 극도로 경색된 상황에서 대금분납과 납입기한 연기, 주식 분할매각 등 성공적 거래 종결을 위한 해결방안을 제안했지만 산은은 양해각서 규정을 변경할 수 없다는 원칙론만 고집했다고 강조했다.
◇ 산은의 무리한 매각추진도 문제
산은도 대우조선 매각을 너무 성급하게 추진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운도 나빴다. 대우조선 매각을 추진한 지 6개월 밖에 안돼 작년 9월부터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계기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확산되면서 국내 금융시장이 급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은은 이번 정권의 중점 추진 과제 중 하나인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대어로 꼽히는 대우조선을 내놨지만 마땅한 인수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우선협상대상자로 유력시됐던 GS-포스코 간 컨소시엄이 막판에 물러서고 현대중공업과 한화컨소시엄이 남았으나 현대중공업은 독점 우려가, 한화는 재무적인 문제가 각각 있었기 때문에 우선협상자 선정이 쉽지 않았다.
한 투자은행(IB) 전문가는 "국책은행인 산은이 금융시장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매각을 성사시키겠다고 무모하게 나서 기업의 재무능력이 의심받던 한화를 우선협상자로 선정한 것은 큰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산은 정인성 부행장은 "한화는 실제 필요한 자금보다 훨씬 많은 자금을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에 인수 자금 마련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장사꾼으로서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한화가 내놓은 인수조건의 타당성과 실현가능성을 꼼꼼하게 챙기지 못했다는 것은 산은이 IB로서의 능력이 아직은 없다는 것과 같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산은이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을 포기하고 재입찰을 추진할 수도 있었으나 민영화 추진을 앞두고 돈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무리하게 매각을 추진했다"며 "이번 협상은 처음부터 잘못끼워진 단추였다"고 비판했다.
◇산은-한화 법정공방 어떻게 될까
본계약 체결이 무산된 데 대한 양측의 책임공방은 이행보증금을 둘러싼 법정다툼에서 승자가 가려질 예정이다.
한화는 조만간 법원에 산은을 상대로 이행보증금 반환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다.
이 소송은 이행보증금의 성격을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이행보증금이 통상의 손해배상액처럼 계약이 불발됐을 때 당사자간의 책임 비중을 따져 돈을 나눌 수 있는 금액인지 아니면 벌금처럼 위약시 반드시 전액을 물어야 하는 돈인지에 대한 판단이 승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법원이 전자의 경우로 판단한다면 한화가 이행보증금의 일정 부분을 반환받을 수 있지만 후자로 결론난다면 산은이 보증금 전액을 가져가도 된다는 판결이 내려진다.
이번 대우조선 인수 건처럼 양해각서상 계약 불발시 이행보증금을 몰취한다는 규정이 명백하고 다른 조건은 명기돼 있지 않을 경우, 대체로 관련 판례는 이행보증금을 위약에 따른 벌금조로 간주해 전액 몰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법원이 한화보다는 산은측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다소 높다는 것.
그러나 법원이 이행보증금의 성격을 `손해배상의 예정액'으로 판단하고 본계약 체결 무산 과정에 산은측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본다면 한화가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