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투전판 대왕딱지를 아시나요?

입력 : 2013-08-27 오후 4:18:23
"아빠, 우리 반 친구 ㅇㅇ이가 다른 친구 ㅇㅇ이한테 딱지 잃었다고 막 울었어. 엄마한테 혼난다고 돌려 달라는데…"
 
어느 토요일 오후, 아파트 단지 공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헐레벌떡 들어온 초등학교 2학년 아들 녀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큰일이나 난 것처럼 한 말이다.
 
2시간 전쯤 나갈 때 들어오기로 약속한 6시를 15분이나 넘긴 녀석이 엄마한테 혼이 날까 무서워 둘러댄 그날의 '핫이슈'였다. 물론 녀석의 술책은 내 아내의 말자르기와 호통으로 통하지 않았음이 증명됐지만.
 
엄마의 폭풍 같은 잔소리를 들은 뒤 풀죽은 모습으로 목욕탕에서 손을 씻고 있는 녀석의 뒷 모습이 참 안쓰러웠다. 말이라도 붙여 기분을 풀어줄 요량으로 문 앞에 서서 "고작 딱지 잃었다고 울어?"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녀석, 씻다 말고 열변을 토한다.
 
"어, 연두색 고무딱지. 걔네 엄마가 이름까지 써 준 딱지야. 친구들하고 따먹기 하다가 잃었는데, 바로 울었어."
 
"너는 그깟 딱지 잃었다고 울고 그러면 안 돼. 아빠가 또 사줄…"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아내가 짧고 빠르게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을 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고, 녀석은 말이 끝나기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그깟 딱지라고 말했던 것이 참 씁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겐 좀처럼 이해가 안가는 대화 내용일 것이다. 딱지 잃고 엄마한테 혼날까봐 운다?
 
내가 어릴적 딱지를 잃었다고 혼날 걱정을 했던가. 내 딱지를 모조리 따간 얄미운 동네 형을 상대로 '언젠가는 꼭 따고 말거야'라는 복수의 칼날을 갈아본 적은 있었다.
 
물론 복수심이 극에 달한 나머지 안방에 걸려있던 달력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을 때는 상황이 좀 달랐지만. 다음 달 치 한 장이나 공책, 스케치북 같은 학용품까지 죄 뜯어 딱지를 제작해 버린 경우라면 엄마에게 등짝을 호되게 맞을 법 했다.
 
하지만 요즘 딱지 이야기를 들으면 아들 녀석 친구가 왜 울었는지 이해가 간다.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초등학생들이 보물처럼 생각하는 요즘 딱지는 우리 어린 시절 달력이며, 굴러다니는 골판지 상자로 만든 그런 딱지 수준이 아니다.
 
인기 만화영화나 게임 캐릭터를 대충 주물로 떠 애들 손바닥만 하게 고무로 찍어낸 형형색색 딱지가 요즘 애들 딱지다. 어린이 채널을 통해,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알려진 이 고무딱지는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폭발이다.
 
얼마 전에는 대왕딱지라는 것까지 등장했다. 20개 들이 기존 딱지 한 상자를 사면 덩치 큰 딱지를 하나 끼워주는 식의 전형적인 미끼 상품 마케팅이다. 판매가 조금씩 뜸해지자 또 다른 최신 캐릭터에 한 상자 아니면 안 되는 얄팍한 상술이 더해졌다. 이 역시 히트를 치며 아이들의 필수 아이템이 됐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가격은 무려 개당 500원, 한상자면 1만원이다. 엄마에게 졸라 구입한 500원이나 되는 딱지를 한방에 잃었으니, 억울하고 분해 울만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가격만이 아니다. 동네 어귀 추억의 딱지놀이가 언젠가부터 도박으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뒤집기 한방에 무려 500원이 왔다 갔다 하는 셈이니 도박이 맞다.
 
아이들에겐 그야말로 자극적일 수 밖에 없다. 심한 아이들은 1만원어치 딱지를 몇 시간 만에 잃고는 또 사달라며 땅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한단다. 엄마가 마지못해 사주면 그길로 또 도전(?)에 나선다니 이정도면 중독 수준이다.
 
요즘 유심히 지켜보면 아파트 단지 공원, 학교 근처 문방구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딱지치기를 하는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모여 있는 모습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눈빛은 그야말로 야수요, 레이저다. 가히 어른들의 투전판과 같다는 말로 그 심각성을 경고하고 싶다.
 
남의 것을 가져와 놓고 즐거워하는 모습, 우는 친구를 배려하지 않는 욕심. 내 아들도 이 못된 놀이를 통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친구를 대했다는 것인가. 서글퍼진다.
 
이처럼 어린이, 청소년들이 해로운 환경에 노출됐다는 말은 별 새로울 것도 없는 고루한 이야기다. 요즘 같이 정치사회적 이슈가 많을 땐 누구하나 신경 쓰는 이 없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고루하게 들릴 정도로 수없이 떠들어 댔음에도 무심하게, 아니 무서우리만치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몇 해 전 초등학생들이 만화 캐릭터 카드로 게임을 하며 돈을 주고받는 게임장의 실태가 언론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 적이 있었다. 그 직후 학교 주변에서 팔려나가는 만화 캐릭터 카드가 놀이인지 도박인지에 대한 논란이 들끓었다. 부모들의 걱정과 항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유사한 카드가 여전히 문구점 계산대 앞을 장식하고 있고, 나를 포함한 학부모들의 걱정도 조금은 시들어 버렸다. 그동안 어른들은 그린존 불량 먹거리와 가축 사료용 맛가루로 순진한 입맛을 더럽혔고, 해병대 캠프에서는 5명의 아이들이 안타깝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동심을 이용해, 부모의 자식 사랑을 이용해 배를 불리는 업자들, 매번 여론의 뭇매를 맞고도 뒷짐지고 서 있는 관계 당국에 질타의 박수를 보낸다. 더불어 무지하게도 그 딱지를 사줘 놓고 왜 나쁜지에 대한 설명을 포기해 버린 나 또한 한심한 어른이었음을 반성한다.
 
박관종 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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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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