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애신·최승환기자] "구직자는 일을 할 수 있고, 정부는 고용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업은 어떨까요. 솔직히 득보다 실이 큽니다. 정부 눈에 나지 않으려고 동참하는 거죠. 정권이 바뀐 후에도 시간제 일자리를 유지하는 곳이 얼마나 될까요."
시간 선택제 일자리에 대한 재계 관계자의 신랄한 지적이다.
시간제 근로자에 대한 처우나 지침 등을 구체화하지 못한 채 대기업들이 속속 채용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정권 눈치보기에 다름 아니다. 기업들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재계, 시간제 채용계획 줄줄이 발표
정부가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민간기업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민간기업의 적극적인 동참 없이는 고용률 70% 달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프라 구축과 제도 개선 뿐 아니라 인건비·사회보험료·세액공제 등을 지원해 기업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방침이다.
오는 26일에는 1만명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시간선택제 일자리 채용박람회도 개최한다. 삼성을 비롯해 롯데, 신세계, 신한, 한진, 한화, CJ, LG, SK, GS 등이 동참한다.
이미 시간선택제 일자리 채용에 나선 기업들은 규모를 늘리는가 하면 눈치를 보던 여타 기업들도 속속 도입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삼성은 내년 초까지 시간제 일자리 6000개를 마련하기로 했다. 채용되면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삼성중공업 등 20개 계열사 120개 직무에서 일하게 된다.
LG그룹은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LG화학 등 10여개 계열사를 통해 시간선택제 근로자 500여명을 채용한다.
SK그룹은 이미 지난 10월말 320명의 시간제 정규직을 뽑았다. 앞으로 180명을 추가로 채용해 연말기준 500명을 뽑는다는 계획이다.
한진그룹은 스튜어디스 100명을 포함, 총 400명을 시간선택제 경력 직원으로 선발한다. 포스코도 계열사와 함께 1000명 규모의 일자리를 도입키로 했다.
재계는 고용 창출 측면에서 시간선택제 일자리 취지에는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 업종에서 실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입장이다.
재계 2위인 현대차가 시간제 채용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동차·조선· 중공업 등은 근로자의 업무 능력이나 기술 숙련도에 따라 기업의 경쟁력이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노조 등의 반발도 해결해야 할 숙제다.
◇기업들 "취지 공감..사실상 구색 맞추기"
일각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고용율 70% 달성을 위해 무리하게 민간기업을 압박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20일 간담회에서 "자본주의 시장에서 정부가 강제한다고 기업이 일자리를 만들 수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기업들의 속내는 다르다. 대내외 불안과 경기침체 등으로 경영 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시간제 일자리까지 늘리는 것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채용을 외면하기에는 정부 눈 밖에 날까봐 신경 쓰이는 게 현실이다.
10대그룹 한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시간제 일자리를 만들고는 있지만 이익 측면에서는 사실상 손해"라며 "전체 고용 인력이 늘기 때문에 관리나 부대비용 등을 고스란히 기업이 떠안아야 한다"고 토로했다.
시간제 일자리 채용 계획을 발표한 대기업 관계자도 "근로자 입장에서는 짧은 시간 집중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겠지만 업무에 대한 몰입도가 낮고 무슨 일이 발생했을 경우 책임 소재를 가리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시간제 일자리에게 적합한 직무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문제다. 업계 관계자는 "일정 매뉴얼을 익히면 바로 일할 수 있는 서비스업의 경우 시간제 일자리가 적합하다"면서 "제조업 등의 경우 점점 고도화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시간선택제 채용 계획을 발표한 기업들의 가장 큰 고민은 따로 있다. 전일제와 시간제 근로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방침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8시간 근무에 야근까지 하는 직원과 4시간 근무하는 직원의 복지가 같으면 오히려 이게 차별을 야기할 수 있다"며 "한 기업이 지침을 만들면 다른 기업들도 그 수준에 맞춰서 정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나마 대기업들의 사정은 나은 편이다. 중소기업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 관계자는 "정부 정책에 발 맞추고 싶지만 그렇지 않아도 경영 상황이 좋지 않은 중소기업들이 몇 곳이나 동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경제단체들은 침체된 경기 속에서 기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기업들이 정부 정책에 동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정부도 기업의 애로사항 해소에 힘써 달라는 주장이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기업에 대한 규제가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려고 하니 기업들은 죽을 맛"이라며 "찍어 누르기식 정책이 정권이 바뀐 후에도 유지될 지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