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성원기자]'화이부동(和而不同)'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입니다. '남들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조건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알쏭달쏭한 뜻이라는데 어쨌든 서로가 차이를 인정하고 평화와 공존을 누린다는 의미라고 하네요.
하지만 솔직히 마음에 와닿지는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담겨있겠지만 현실에서 한발짝 비켜나 있기 때문이죠. 교수님들의 희망처럼 당장 '화이부동'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차라리 이 '사자성어'가 우리의 현실을 잘 설명해주지 않을까요. 바로 '구/조/조/정'입니다.
참 무서운 단어죠. 그런데 최근 우리 경제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로 부상한 까닭에 다들 '구조조정'을 대하는 감각이 무뎌진 듯합니다.
신통방통하다는 포털사이트에 이 살떨리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엄청난 양의 콘텐트가 쏟아져나옵니다. 만성이 된 걸까요, 아니면 이미 10년 전 한바탕 홍역을 치렀기 때문일까요.
하기야, 인터넷으로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접하면서도 멍하니 턱을 괸 채 '클릭질'을 하는 세상. 겁먹고 놀랄 일이 없어지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구조조정이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실직 공포 때문이겠죠. 정부는 거시경제와 산업정책적 측면에서 구조조정에 접근하겠지만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중요한 건 '내 밥그릇'입니다.
외환위기 당시 국민들이 눈물을 흘렸던 것은 '조국'이 부도 사태를 맞았다는 슬픔 때문이 아니라 내 직장, 우리 가정이 '막장'으로 내몰렸다는 절망감 때문일 겁니다.
일단 정부는 구조조정 자체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한 금융당국 고위관계자는 미국 정부의 시장안정 대책이 전혀 힘을 못 썼다는 얘기를 꺼내며 "우리는 예전에 다 해봤다"고 했습니다. 외환위기, 기업 연쇄부도, 카드채 사태 등 굵직굵직한 현안을 처리하며 '내공'을 키웠다는 얘기였습니다.
비록 미국 증시 움직임에 국내 주식시장이 출렁이는 처지지만, 적어도 위기대처 능력만큼은 우리가 '형'이라는 뜻이죠. 물론 정말 '근거 있는' 자신감인지는 이미 시장이 판단하고 있을 겁니다.
구조조정이 끝나고 나면 살아남은 기업들의 세상이 될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최근 독일의 반도체업체 '키몬다'가 파산을 신청하자 하이닉스반도체가 상한가를 친 게 좋은 사례가 되겠네요.
산업 분야에 따라 경쟁의 단위는 달라지겠지만 구조조정의 삭풍을 뚫고 살아남는다면 새롭게 재편된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구조조정 대상 기업을 선정할 때 재무상태만 보지 않고 산업정책적 측면을 고려할 것이라는 입장도 다시 한번 확인해줬습니다.
정부는 여전히 채권은행 중심의 구조조정 방침을 거듭 밝히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정부의 판단이 구조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장부상의 숫자로만 판단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살릴 기업과 죽일 기업을 선별하는 데 정부가 개입할 여지를 남겨두겠다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삼성전자가 총체적인 위기에 몰렸다 할지라도 정부가 재무제표를 흔들어대며 삼성전자를 잘라내지는 않을 겁니다.
정부의 자신감은 좋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구조조정 후폭풍에 대한 배려입니다. 구조조정에 대한 내공을 키웠다면 상처를 보듬는 방식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구조조정이란 단어에서는 피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역한 냄새에 금세 코가 마비되는 것처럼, '구조조정 시국'을 맞아 우리는 너무 빨리 피냄새에 만성이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살떨리는 말을 무미건조한 문자로 너무나 자주 접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멍하니 턱을 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신속하고 과감한 구조조정도 좋지만,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을 위한 우리사회의 '연착륙 시스템'이 지난 10년간 얼마나 발전했는지 한번 따져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정부도 나름대로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겠지만 그런 고민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생채기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기 전까지 구조조정은 끝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조조정'의 산을 넘어 '화이부동'의 바다를 만날 수 있을까요. 건설, 조선사의 2차 구조조정을 위한 신용위험 평가는 다음달 중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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