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수백억원의 회사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최태원 SK그룹 형제에게 27일 징역형이 확정된 가운데 재벌들에 대한 사법의 잣대가 엄격해진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재계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파기환송심 끝에 기사회생했을 때 고무됐던 분위기와는 정 반대로 얼어붙었다. 이른바 ‘김승연 회장 온풍(溫風)’이 하루아침에 된서리를 맞은 형국이다.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27일 특경가법상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회장 등에 대한 상고심에서 최 회장에게 징역 4년을, 최재원 수석 부회장에게 징역 3년6월을 각각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천억원대의 횡령·조세포탈·배임 혐의로 기소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징역 4년에 벌금 260억원을 선고받은 뒤 13일 만이다.
김 회장이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을 때 법조계에서는 사법부의 잣대가 낮아졌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았다. 뒤이어 이번 SK그룹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그를 증명했다는 평가다.
대법원 관계자도 이번 판결에 대해 “재계 서열 3위인 SK그룹의 회장인 최태원, 부회장인 최재원이 그룹 계열사의 자금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유용한 행위 등에 대해 엄정한 책임을 물었다는 점과 현존하는 재벌그룹 회장에 대해 실형이 확정된 것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재벌 총수의 형사사건에서 그룹의 규모나 경제에 미치는 영향, 현직 최고경영자인지 여부는 양형에서 주요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 회장 형제에 대한 하급심 판결에서 법원이 밝힌 양형사유는 매우 엄격하면서도 단호하다.
1심을 맡았던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원범)는 최 회장에 대한 양형부분을 4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적시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대기업총수)에 대한 양형의 기본적인 시각’이라는 소제목으로 시작되는 양형이유 판시 부분에서 “피고인이 점하고 있는 그룹의 위상과 영향력을 생각할 때 유죄판결만으로도 계열사와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을 것이기에 처벌수준을 정하는 데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하지만 재판부는 우리 사회에서 사업영역의 무리한 확장, 과도한 이윤추구적 기업운영 등을 이유로 계속 되어 온 대기업의 폐해가 피고인의 양형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데 동의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피고인에 대한 처벌이 우리 경제계에 미치는 영향을 피고인의 형사책임을 경감하게 하는 주요사유로 삼는 데도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피고인의 범행은 자신이 지배하거나 영향력이 미치는 다수의 유력기업을 범행의 수단으로 삼아 그 회사 재산을 단기간 내에 대량으로 사적인 목적에 활용함으로써 기업 사유화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비난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유공과 더불어 SK그룹의 전신인 선경그룹 시절부터 이미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공익적 활동을 선도하며 국민기업으로 성장해 온 SK그룹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저버리고 전체 대기업에 대한 불신을 더욱 가중시키는 행위로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의 실망감은 참으로 심대하다”고 지적했다.
또 “피고인이 국내외에서의 창의적인 경제활동과 활발한 공익활동으로 우리 사회의 제영역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은 점, 이 사건으로 경제계에 미칠 영향 등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우리 경제체제의 공고성과 성숙도의 신뢰 위에서 피고인은 관용에 앞서 그 범법행위에 대한 엄정한 대처의 당위성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며 “피고인에 대해 그 책임에 상응하는 실형의 처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문용선)는 더욱 엄정하고 냉정하게 양형을 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대규모 기업집단의 최고경영자가 지위를 이용해 개별기업의 자금을 동원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경우, 이로 인하여 개별기업의 경영을 위태롭게 하고 개별기업의 주주, 종업원, 채권자 등 다수의 이해관계인에게 피해를 입게 하며, 나아가 주식회사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를 저해하게 하여 우리 경제질서의 근간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서 그 비난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그에 상응한 엄정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기업인으로서 정상적인 기업경영활동을 통하여 이윤을 추구하고 이로 인한 정당한 대가를 획득하여야 함에도, 무속인 출신의 김원홍이 마치 신통력을 이용해 막대한 자금을 일시에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믿고 일확천금을 추구하기 위한 동기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피고인들의 이러한 허황되고 탐욕스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계열사의 자금이 동원되었다는 점에서 그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시했다.
또 “피고인들은 그때 그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실과 허위 사이를 넘나들면서 마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면 진실과 허위를 뒤바꾸고 수사기관 및 법원을 마음대로 조종이라도 할 수 있는 듯한 태도를 보여왔다”며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따라 헌법과 법률이 정하고 있는 재판제도 및 재판기능을 수행하는 법원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법률심으로, 양형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았지만 최 회장측이 마지막까지 문제삼았던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에 대한 증인 신청에 대해 “증인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원심의 조치가 증거채택에 관한 재량권의 한계를 벗어나 위법하다고까지 평가할 수는 없으므로, 원심에 직접심리주의를 위반하거나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은 없다"고 일축했다.
앞서 이재현 한화그룹 회장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24부(재판장 김용관)도 “CJ 그룹은 삼성 그룹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식품사업, 물류사업, 문화사업 등으로 국가 산업 발전 및 문화 발전을 위하여 노력해왔으나 그러한 노력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최고경영자에 의한 준법경영 및 투명경영이 선행되어야 할 것인데, 피고인 이재현이 개인재산 증식 및 비자금 조성을 위해 범행을 감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CJ 그룹 전체의 발전 및 기업 이미지 개선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피고인의 조세범죄는 국가의 조세징수 질서를 어지럽히고 조세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중대범죄이고, 일반 국민들의 납세의식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비난가능성이 커 엄벌이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고위 법관 출신의 한 기업사건 전문 변호사는 "사법부 잣대의 높이가 쉽게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재벌들의 발상 자체가 잘못"이라며 "재벌 총수별 양형이 달라지더라도 그것은 법리적 쟁점에 대한 입증 차이 때문이지 그 외의 사정에 초점을 맞춘 꼼수가 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경고했다.
◇◇횡령·배임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좌)과 최재원 수석부회장(우)이 2011년 12월 검찰소환조사를 받으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사진=뉴스토마토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