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종용기자] 지난해 11월 전산시스템 변경을 결정한 국민은행 경영협의회의 의사록을 보면 시스템 관리업체인 IBM은 국민은행이 요구하는 '중도해지 요건'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재협상이 결렬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지주사와 은행 임원이 주전산기를 기존 IBM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로 교체하도록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나온다.
2일 뉴스토마토가 입수한 '국민은행 제22차 경영협의회 의사록'은 지난해 11월11일 국민은행 여의도 본점에서 의장(은행장 이건호) 주재로 경영협의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이날 경영협의회에는 이 행장을 비롯해 이사부행장 및 본부 본부장 등 경영진 19명이 전원 출석했다.
◇"국민銀-IBM, 중도해지조건 수용 안돼 재협상 결렬"
(사진=뉴스토마토DB)
의사록에서 윤영환 IT채널개발부장이 '주전산기 기존 변경(안)'에 대한 보고를 마친 다음, 당시 박동순 상임감사위원이 "IBM과의 협상에서 당행(국민은행)의 요구조건을 IBM측이 수용하지 않아 협상이 결렬됐다고 했는데, 자세한 경과를 설명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김상성 전무(IT본부장)는 "양사(국민은행과 IBM)가 동일하게 2차에 걸친 제안요청과 협의과정으로 진행됐다. 2차까지의 협상결과 비용부분에서는 IBM이, 기술적인 부분과 트렌드 부분에는 유닉스사가 유리했다"고 말했다.
이어 "2차까지의 결과를 토대로 유닉스로 결정했으나 시스템 전환 등에 따른 리스크 등을 간과할 수 없어 IBM측에 추가적으로 3차 제안을 요구했다"며 "IBM측에 비용이나 계약상의 불합리함을 제거하는 것을 요청했으나, 시한까지 당행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유닉스 도입을 결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국민은행은 기존의 IBM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로 전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환리스크나 비용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기존 고객인 IBM과 여러 차례 협상을 이어갔다. 비공식적으로도 IBM측에 추가 제안 기회를 줬다는 내용도 있다.
회의록에서 김 전무는 "2차 SC에서 주전산기기를 유닉스로 결정하되 다만 IBM측에 3차 제안 기회를 제공해 제안수준이 당행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킬 경우 IBM측과 재계약을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스티어링 커미티(SC, Steering Committee)는 은행의 주전산기 선정을 위한 협의조정 기구이다.
그러나 그는 "3차 SC 시점까지도 IBM측은 당행의 요구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유닉스로 최종 결정하게 됐다"며 "그 이후에 IBM측이 비공식 제안을 통해 비용부분에 대해서는 당행의 요구수준을 충족시켰으나, 중도 해지 조건에 대해서는 최종적으로 당행의 요구수준에 부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윤식 상무(전략본부장)는 "3차 SC 최종 결정 이후의 비공식 제안은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결국 IBM은 마지막 비공식 제안 등을 통해 비용 부문에 있어서는 국민은행의 요구수준을 충족했으나, 은행이 요구하는 중도해지조건은 수용 불가를 고수하면서 재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의사록에서 윤영환 부장은 "IBM과 협상조건은 장기일괄계약으로 2020년까지 사용을 담보해야 한다"며 "이럴 경우 IT는 2020년까지 IBM의 메인프레임에 종속돼야 한다. 당행의 중도해지 가능 조건은 필수적인 요구사항이었다"고 설명했다.
◇'유닉스 전환토록 압박있었다' 의혹, 설득력 떨어져
의사록에는 협의회 의장인 이건호 행장의 발언도 있다. 이 행장은 "(IBM의)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로 전환했을 때 기존 프로그램이 원활하게 작동하느냐는 기술적인 리스크와 보안 관련 리스크가 있다"며 "IT본부에서 각각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윤 부장은 이에 대해 "기술적인 리스크는 BMT과정을 통해 조치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고, 김종현 상무(정보보호 본부장)는 "보안적인 측면에서는 기종 자체보다 외부에서 침투를 얼마나 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라며 "시스템을 결정할 시에는 중요한 부분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 행장은 "'다른 의견이나 질문이 없으면 '주전산기기 기종 변경(안)'은 참석한 경영협의회 위원 전원의 동의를 구해 원안대로 결의된 것으로 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은행 경영진들은 이날 경영협의회에서 차기 주전산기를 기존 IBM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로 변경하는 것으로 최종 결의했다. 이후 성능 및 용량 등에 대한 기술검증(BMT)을 실시키로 했다.
그 다음부터는 이미 알려진대로다. 올해 4월14일 셜리 위 추이 IBM 한국대표가 이건호 은행장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IBM 메인프레임의 가격을 지난해 제안가보다 낮추겠으니 국민은행이 앞으로 계속 메인프레임을 써달라는 내용이다.
지난해 여러 차례 협상에서 요구조건을 맞추지 못한 IBM이 이번엔 국민은행장을 직접 접촉한 것. 메일에는 지난해 주요 결격사유였던 중도해지 요건을 수용하겠다는 내용은 없었고, 대신에 가격을 지난해보다 300억원 가량 낮춰 제시했다.
이어 4월24일 정병기 국민은행 상임감사는 입찰대상을 제한할 경우 배임의 소지가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유닉스로의 기종전환 방침을 전면 백지화해 IBM 메인 프레임도 입찰에 참여시키는 안을 제시했고, 이 행장도 이에 동조했다.
내부 관계자는 "지난해 공식 일정 외에도 비공식적으로 IBM에 제안기회를 주는 등 편의를 봐줬지만 국민은행이 요구하는 조건을 맞추지 못했다"며 "지주사와 국민은행의 일부 임원이 의사 결정과정에서 IBM의 참여를 제한했다는 주장은 말이 안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국민은행은 사외이사들 주도로 지난달 23일 임시이사회를 열고 IBM과 한국IBM을 공정거래법의 위반으로 당국에 신고하기로 결정했다.
사외이사들은 "여러 정황을 검토한 결과 IBM의 가격정책이 독점 이윤의 추구를 위해 사회적 후생을 가로막는 시장폐해를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행장은 IBM과 유닉스 모두에게 입찰 제안서를 받아보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미 IBM은 지난해 국민은행의 요구조건을 맞추지 못해 재협상 자격을 잃었고, 올해 은행의 유닉스BMT에도 IBM유닉스를 갖고 참여했으나 우선협상자에 선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그러자 IBM측은 이 행장측에 이메일로 접촉해 '가격을 낮출테니 메인프레임으로 유지하자'고 하는 등 입장을 번복하고 절차를 무시했는데도 입찰자격을 주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
아울러 전산시스템 교체 내분사태는 감독당국의 징계안에 올라가 있다. 이건호 행장 등 국민은행은 물론 임영록 회장과 김재열 전무 등 KB금융 임원들도 이와 관련해 중징계를 사전 통보 받았다.
금융감독원은 전산교체 최초 결정이 있은 경영협의회 의사록을 이미 제출받은 가운데, 이 내용을 바탕으로 오는 3일 열리는 제재심에서 이건호 행장 등 임원진들의 입장을 듣고 질의응답을 이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