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뭘 해도 잘 풀리지 않는다. 어렵사리 환경이 형성되면 또 다른 돌발변수가 가로막는다. 이 과정에서 진정성은 왜곡되기 일쑤다. 21개월째 옥중 생활이지만 시선은 차갑다 못해 따갑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야기다.
최태원 회장은 500억원대 횡령 등의 혐의로 지난해 1월31일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이후 억울함을 호소하며 항소와 상고, 두 번의 재판을 더 받았지만 1심에서 선고된 4년의 감옥생활에는 변화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 거액의 횡령이나 배임 등의 혐의를 받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난 다른 재벌 총수들과 비교해 '지독히도 운이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다. 법정진술 번복이라는 전략은 최악의 수가 됐고, 그를 재벌 총수로는 이례적으로 '최장기간 수감생활'이라는 불명예로 이끌었다.
건강 등의 핑계를 대지 않고 엄정한 법의 심판을 정직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예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치욕적인 기록이다. 이미 그의 감옥생활은 600일을 넘어 형량의 절반인 2년을 향해 흐르고 있다. 선장을 잃어버린 SK로서도 하루하루가 고난의 시간이었다.
재계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을 전후로 조성된 재벌개혁과, 특히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표현되는 쓰러진 법치원칙 근절 등의 사회적 기류에 최 회장이 '희생양'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거액의 비리를 저지른 만큼 엄벌에 처해져야 마땅하지만 그간 재벌 총수들에게 용인됐던 이른바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공식에 대입조차 하지 못한 유일한 총수라는 점에서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최 회장이 14일 펴낸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이라는 사회적 기업 전문서적이 불러올 파장이 어디로 튈 지는 알 수 없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에 이어 최경환 경제부총리까지, 내각의 핵심 실세들이 경제활성화를 명분으로 사실상 최 회장의 선처를 시사한 발언들을 연이어 내놓음로써 정부의 의지는 확인됐다. 남은 것은 여론.
SK로서는 저서 출간을 놓고 갖은 해석이 제기될 것에 대한 부담도 컸다. 물론 근저에는 사회적 기업에 대한 최 회장의 지론이자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선대회장부터 이어져 온 그 진정성에는 재계 누구도 이견이 없다. 특히 생색내기용 단순기부를 넘어 사회적 기업을 통한 생태계의 혁신을 꾀하겠다는 그의 주장에는 오랜 경험과 고민, 철학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최 회장은 600여일 간의 옥중생활 동안 고민으로 녹여져 전달된 수천장의 메모지를 통해 책을 펴냈다. 그는 230여페이지 분량의 책을 통해 사회적 기업 생태계 활성화의 새로운 방안으로 사회적 기업에 대한 가치평가를 기반으로 한 SPC(사회문제 해결정도에 비례해 사회적 기업에 제공하는 인센티브) 개념 도입을 제안하고 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한 기업에 그에 걸맞은 인센티브를 부여함으로써 적절한 동기 부여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 이는 곧 사회적 기업의 활성화와 함께 사회 문제의 능동적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 2010년 대기업 최초로 사회적 기업단을 출범시켜 사회적 기업 활성화에 적극 나서고 있는 SK그룹이기에 제안의 의미는 더욱 크다.
최 회장은 책 머릿말에서 "이 책은 앞으로 사회적 기업 활성화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일종의 출사표와 같다"고 적었다. 앞으로 사회적 기업 활성화에 헌신할 테니 그에 합당한 인센티브를 기대한다는 말일까. 여론을 향한 약속임은 분명해 보인다.
앞서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잘못된 기업인도 여건과 여론이 조성되면 다시 기회를 줄 수 있다"며 분위기를 띄우자, 정권 최고 실세인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다렸다는 듯 "기업인이 구속상태면 투자에 지장이 있다"고 화답했다.
SK로서는 모처럼만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국정감사가 발목을 잡았다.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이 수감 중인 재벌 총수들의 면회 횟수를 거론하며 '황제복역' 비판을 쏟아냈고, 그 중심에 최 회장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복병의 등장에 여론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법무부에 따르면 최 회장은 1년5개월여간의 복역기간 중 1800번 가까이 면회를 했다. 하루에 세 번 꼴로, 일반인이 주 1회 정도 면회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과하다고 볼 수 있다. SK와 변호인단은 최 회장을 위해 교도소 근처 따로 사무실을 내는 등 그의 옥바라지에 최선을 다했다.
당장 '황제면회'와 '최태원'이 주요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권을 휩쓸었다. 비난여론이 들끓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SK의 속은 탔다. 사회적 기업에 대한 최 회장의 진정성이 왜곡되는 것을 염려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재벌 총수들과 달리 어떤 핑계도 없이 수감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죄라는 자책도 뒤따랐다.
SK는 당초 13일에 발표하려 했던 책 발간일을 하루 늦췄다. 언론에 사전 배포하려던 책 요약본 등의 자료 진행도 일제히 멈췄다. 여론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교도소 안에 있는 범죄인이 무슨 사회적 기업과 기업의 책임을 논하냐는 반론에 처할 것을 우려했다. 다만 사회적 기업 월드 포럼이 14일 예정돼 있어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 회장은 "단지 기업 경영의 가치에 대한 고심과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보다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 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정리한 것"이라고 책을 소개했다.
김광남 극동대 교수는 최 회장의 책 발간과 관련해 "정상참작을 바라는 것일 수 있다"면서도 "지금이라도 사회적 경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생색내기 용이 아니길 바란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