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란 다소 거칠어야 할 필요가 있다. 글은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의 공격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어드 케인즈가 남긴 말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그에 대한 비판이나 검증 없이 방대한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요즘의 세태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1990년대 아시아 경제위기를 예견한 것으로 유명한 폴 크루그먼(사진) 프린스턴대학교 교수는 지난 8일(현지시간) 뉴욕타임즈(NYT)에 기고한 '생각 없는 사람들의 승리'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생각하지 않는 사회를 향한 쓴소리를 날렸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지난 8일 뉴욕타임즈 칼럼을 통해 생각하지 않는 사회에 일침을 날렸다. 사진은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당시의 모습. (사진=신화/뉴시스)
그의 칼럼은 얼마 전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보수당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주목 받았지만 사고의 부재로 다양성이 사라진 현실에 대한 성찰이기도 했다. 무비판적으로 정보를 수용하고 사실에 대한 확인 없이 다수가 동일한 의미의 정보를 확대 재생산 하고 있는 상황을 '미디어매크로(Mediamacro)'라는 말로 꼬집었다.
미디어매크로는 사이먼 렌 루이스 옥스포드대학교 교수가 주창한 개념으로 언론이 만드는 거시경제란 의미다. 언론이 묘사한 경제 상황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실제 경제 현상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을 지칭한다.
루이스 교수는 대표적인 미디어매크로의 사례를 영국 경제에서 찾았다. 대부분의 언론이 가설이 아닌 완전한 사실처럼 다룬 내용은 대략 이렇다. 2010년까지 집권한 노동당은 무책임하게 과도한 재정을 지출했다. 이 같은 재정 낭비가 2008~2009년의 경제 위기를 불러왔고, 자유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보수당에게는 긴축정책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한 결과 영국은 2013년 성장 국면으로 접어들며 긴축정책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그러나 크루그먼은 "완전히 잘못됐고 바보 같은 소리"라며 이를 정면 비판했다. 금융위기 이전 영국은 재정적으로 낭비가 심하지 않았다는 것. 이 같은 주장은 그의 4일자 칼럼에서도 제기됐다. '미디어매크로가 대서양을 건넜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금융위기 이후 발간된 국제통화기금(IMF)의 연례협의 보고서를 인용해 영국 정부가 긴축정책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음을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위기 후인 2009회계연도(2009년 4월~2010년 3월)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39.3%로 2007회계연도(2007년 4월~2008년 3월)의 38.3%, 2008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의 38.9%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걱정해야 할 만한 수준도 아니다.
크루그먼은 글로벌 현상이었던 위기는 은행과 개인의 부채 때문이었지 정부의 재정적자 때문이 아니었다고 거듭 강조한다. 영국 경제가 성장 국면에 접어든 것도 긴축정책을 잠시 멈춘 이후고 연립정부 집권 첫 2년간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불황에서는 케인즈의 '글은 사나워야 한다'는 말이 적용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되레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달갑지 않은 생각을 차단하는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불황을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수단과 생각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
이 같은 상황은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금융위기라는 커다란 짐을 안고 출범한 오바마 정부도 해답은 수요 진작을 위한 부양책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긴축을 주장하는 공화당에 밀려 섣불리 행동 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미국의 경기 회복은 양적 완화 이후 가시화됐다는 첨언도 잊지 않았다.
크루그먼은 금융 산업을 위해 일하는 경제학자들의 나쁜 영향이 이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재정 적자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는 끊임없이 퍼뜨리고선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대가는 전혀 치르지 않았다고 일격했다. 루이스 교수도 블로그를 통해 크루그먼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의 미디어매크로는 오로지 경제에만 관심 있는 정치 평론가들의 입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크루그먼은 이번 영국 총선이 실패한 경제학 독트린에 대한 심판이 됐어야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명백히 잘못된 주장과 생각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영국의 대다수 언론이 이런 '나쁜 경제학'을 진실로 보도했다는 것. 보수당 정책의 오류를 널리 알렸어야 할 노동당조차 대중에 대한 나쁜 경제학의 쉬운 어필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지난 7일 실시된 총선에서 보수당은 전체 650개 의석 중 과반인 331석을 확보해 압승을 거뒀다. 근소한 차이로 재집권에는 성공하겠지만 연립 정부 구성이 불가피 할 것이란 예상을 완전히 뒤집은 결과다. 노동당은 230석을 얻는데 그쳐 1987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 대표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크루그먼은 금융위기 이후 가장 필요했던 것은 위기 극복을 위한 힘든 결정이 아니라 열심히 생각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불황이라는 특별한 환경에서는 통상적인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공공 담론에서 이는 철저히 배제됐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누가 영국 경제를 이끌든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바보는 아니길 바란다는 독설로 글을 맺었다.
김진양 기자 jinyangkim@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