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구금·고문 피해자 일본에 귀화했더라도 배상해야" 첫 판결

대법원 "우리와 일본은 국가배상 상호보증 인정"

입력 : 2015-06-18 오전 6:00:00
간첩 혐의로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구타, 고문 등 가혹행위를 받은 피해자가 일본인으로 귀화했더라도 국가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첫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허모(72)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상고심에서 "위자료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8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허씨는 일본인으로서 우리나라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국가배상법의 적용을 받으려면 일본에서 우리나라 국가배상법 7조가 정하는 상호보증이 있어야 하며 일본 국가배상법 1조 1항과 6조는 우리나라 국가배상법과 동일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실제로 일본에서 다수의 재판례를 통해 우리나라 국민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가 인정되고 있으므로 양국 사이에 우리 국가배상법 7조가 정하는 상호보증이 있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어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결정해 국가가 소멸시효의 이익을 원용하지 아니할 것 같은 신뢰를 부여했고, 허씨는 진실규명 결정일부터 상당한 기간 내에 손해배상 청구의 소송을 제기했으므로 이러한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 국가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나는 권리남용에 해당해 허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허씨는 1943년 9월 일본에서 출생해 국립 오사카대와 대학원에서 공부 한 후 1973년 3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허씨는 1975년 10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기숙사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 의해 간첩혐의로 영장 없이 연행됐다.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을 당시 허씨에게는 가족의 면회와 변호인 접견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수사관들로부터 구타와 협박을 받으면서 자백을 강요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76년 4월 국가보안법상 회합 통신, 간첩 및 반공법상 잠입 등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해 허씨에게 징역 3년6월, 자격정지 3년6월 형을 선고했고, 허씨가 항소했으나 기각했다.
 
대법원은 그해 12월 허씨의 자백 외에 범행을 보강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했고, 서울고등법원은 1979년 1월 원심판결을 파기해 공소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허씨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2010년 7월 "국가는 중앙정보부가 허씨를 장기간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가혹행위를 가한 점 등에 대해 사과하고,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이에 허씨는 2011년 12월 국가를 상대로 1억원을 지급하라는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국가는 "허씨가 2006년 일본으로 귀화해 외국인이고 일본과 우리나라는 국가배상에 관한 상호보증이 없어 이 사건의 소는 부적법하다"며 항변했다.
 
1심은 국가 권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불법 구금과 고문이 자행된 점을 인정했으나 허씨가 무죄 판결에 따른 형사보상을 청구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위자료 금액을 3000만원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2심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에 비춰 허씨가 국가를 상대로 형사보상을 청구할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점, 비슷한 유형의 사건에서 인정된 위자료 금액과의 형평성, 허씨의 가족관계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면 허씨에 대한 위자료를 1억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며 원고승소 판결했다.
 
정해훈 기자 ewigjung@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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